일 분 일 초도 쪼개 써야 하는 마당이면 한 잔의 단백질 셰이크로 식사를 대충 때워도 될 법한데, 주희에게는 바쁜 현대인의 덕목에 철저히 위배되는 특징이 한 가지 두드러진다. 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만큼 주희의 턱이 부산해지기 시작한다는 것.
작성해야 할 보고서가 수두룩하거나 데드라인에 쫓길 때,
오해를 풀고 싶은 대상에게 용기 내어 먼저 연락을 했지만 기약 없이 답장만 기다리고 있을 때,
입사 면접을 준비할 때,시험공부를 할 때 등등
심적 압박감을 느낄 때마다 해바라기 씨앗을 갉아먹는 햄스터처럼 변신하고 마는 주희.
바삭바삭한 크래커, 질겅질겅 씹기 좋은 오징어, 단단한 견과류 등으로 씹는 욕구를 달래주지 않으면 불안 초조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늘 턱 근육이 뻐근할 정도였다.
주희는 목젖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가볍게 미소 지을 때 보이는 전면에 배치된 치아 몇 개를 제외하고는 인레이, 크라운 등 금 보철물들이 번쩍번쩍 위용을 과시하니 평소 입이 크게 벌어지는 게 늘 신경이 쓰여 마음 놓고 크게 웃을 수 없었다.
오늘은 아침 식후 치실을 하다가 삐끗하는 바람에 때워놓은 금 인레이마저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 마이 갓!
병원 다닐 시간은커녕
밥 먹을 시간도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뭔가를 씹지 않으면 안 되고
치과 문제로 고통까지 받아야 하는 걸까.
치과를 한 번 갔다 하면 한 달 안에 치료가 종결되는 법이 없으니 이번에는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나 싶어서 울적함이 밀려들었다.
오늘은 일을 채 마무리 짓지 못해 퇴근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식탁에 노트북부터 세팅을 해놓고 2차전을 시작했다. 그러다 새벽 2시 무렵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전생 상영관을 다시 찾아주신
주희 님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궁금해했던
발자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전생의 주인공은
중세 후기의 '마르쿠스'라는
귀족입니다.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귀족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마르쿠스는 자제력 없이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데 집중하는 사내였습니다. 특히 미각(味覺)에 대한 집착이 강해, 자신의 영지 백성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사치스러운 음식과 술을 끊임없이 탐닉했습니다.
마르쿠스의 가장 큰 업(業, 카르마)은
자신의 치아와 입을 사용하여 과도한 탐욕을 채우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일같이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배가 불러도 계속해서 먹었기에 음식의 낭비가 극심했습니다. 이는 필요 이상의 것을 입으로 취하고 소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며, 불만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폭언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입(口)을 통해 남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불안하거나 짜증이 날 때마다 값비싼 향신료나 사탕을 끊임없이 씹고 맛보면서 감정을 회피했습니다. 이 무분별한 씹는 행위는 과도한 감각적 만족 추구와 내면의 불안을 물질로 덮으려는 탐욕의 상징이었습니다.
마르쿠스는 평생 호의호식했지만, 만년에 이르러서는 잇몸병과 치아 통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즐거움의 원천이었던 '입'과 '치아'를 통해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되었고, 수많은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은 호전되지 않아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낭비하고 착취했던 물질적 풍요가 결국 자신의 육체를 침범하는 업보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르쿠스의 탐욕스러운 '씹음'과 착취하는 '입'의 업보는 현생의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은 운명으로 윤회하게 됩니다.
첫째, 현생의 주인공은 전생에 치아를 통해 과도하게 쾌락을 취하고 낭비했던 업보로 인해,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잇몸병, 충치, 치아 깨짐 같은 문제로 끊임없이 고통받고 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습니다.
(전생에 누렸던 사치와 쾌락의 대가를 육체적으로 지불하는 셈)
둘째, 전생에 불안을 '씹어서' 해소하려 했던 습이 남아 현생에서 중압감이나 불안에 처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를 계속 씹는(혹은 턱을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 불안을 해소하려 합니다.
셋째, 그녀는 가장 기본적인 건강 관리(치아)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 무력감과 고통을 겪으며 이는 전생에 그녀가 외면했던 백성들의 끊임없는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제 궁금증이 다 해결되셨나요?
다음에 또 다른 상영관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꿈속에서도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 주희는 연신 탄식을 뱉어내다가 화들짝 잠을 깼다.
방금도 잠들기 직전까지 초조함을 감당하지 못해 먹고 있던 딱딱한 고구마 스틱이 절반쯤 바닥을 드리내고 있었다. 황급히 도리질을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는 안 찾을 요량이라는 듯 고구마 스틱을 밀폐용기에 담아 주방 싱크대 서랍 깊숙이 넣어버렸다.
앞으로는 작은 습관 하나도 허투루 몸에 배게 하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가지면서, 작업 중에 주전부리에 손대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고 다짐을 하는 순간. 주희는 따뜻한 꽃차 한 잔을 가져와 서너 번의 심호흡으로 향기를 마시며 마음의 평안부터 찾고 이내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