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처서를 기다리며 절기매직을 외쳤지만 반신반의 했더랬다. 이 더위가 계속되면 어쩌지. '입닥쳐 추워지려면 아직 멀었어'의 줄임말이라는 입추를 보내면서도 긴가민가 했었다. 하지만 이 기후위기 속에서도 조상님들의 절기는 빛을 발하는 듯하다. 확실히 아침 저녁의 공기가 달라졌다. 자다 여러 번 깰 만큼 극강의 열대야를 경험해서 감지덕지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야 조금 '여름밤'다워진 느낌이다.
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여름밤이 약간의 서늘한 기운을 비치니 마음이 또 복잡해진다. '아, 이렇게 한 해가 또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여름이 사람 늘어지게 할 만큼 뜨거워서 그런지 공기가 차가워지는 한 해의 후반부는 너무 후다닥 지나가는 느낌이다. 시간에 그렇게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자꾸 손가락으로 내 나이를 꼽아보게 된다.
나의 여름은 꽤 심플하다. 새로운 회사에서 열심히 적응 중이고, 일 이외의 대부분의 것들을 하지 않고 에너지를 아끼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내 생활이 없고 인풋이 없고 어쩌고 징징댔을 텐데 지금은 내 몸과 정신이 무리한 일정과 업무를 잘 받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사람이 이렇게 변하기도 한다.
약간 낯간지러울 정도로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살고 있다. 더운 여름 어디 밖에서 돌아다니지 않고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것, 가족들이 건강하고 보금자리가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요즘의 나에겐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려서일까. 철들었다는 말로 퉁치기엔 여러 겹의 감정들이 스쳐지나간다.
주말에 잠깐 만난 친구와 이러다가 또 약간의 공간이 생기면 두리번 거릴 게 뻔하다고 얘기했는데, 아마도 그럴 것이다.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상 또 뭔가 찾아보려고 하겠지. 그때는 또 그렇게 살면 된다. 지금은 이게 좋으니까 이렇게 살면 되는 거고. 그때그때 내가 좋아하는 호흡으로 살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늘 급하고 바빴나 모르겠다.
소확행, 사소한 행복, 이런 말들은 나의 지금 마음과 기분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약간 아쉽다. 그냥 삶의 한 자락이 내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느낌, 그래서 많은 것들이 대수롭지 않아졌지만 그래도 또 미처 몰랐던 것들이 감사하고 대수로워진 그런 느낌이다. 그저 별일 없었으면 좋겠고,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일에 몰두할 때면, 더 욕심을 내고 싶고 더 잘했으면 좋겠고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 건 별일 없는 하루, 그게 아닌가 싶다. 스물다섯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났으면 되게 재미없는 언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른일곱의 나는 스물다섯의 내가 자기 꼴리는 대로 롤러코스터를 타며 살았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자기연민에 빠지지는 않되 그때의 나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들을 이제라도 많이 해주려고 한다. 충분히 격려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내가 지금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지금의 내가 좋다면 그때의 선택들이 좋았다는 거니까.
지금의 나 또한 미래의 내 맘에 쏙 들 것이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