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일제문소 Aug 16. 2021

다사다난

지나간 후에 할 수 있는 말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은 주로 과거형으로 쓰인다. 보통 '다사다난했다'라고 회상하듯 쓰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물론 여러 사건과 여러 어려움은 모두에게 진행형으로 벌어지지만 '다사다난'이라는 말로 퉁쳐지는 것은 주로  일들이  지나간 . 나는 가끔씩 엄마와 길게 수다를 떠는데 오늘 수다의 결론은 '너도/나도  다사다난했다.'였다. 여기서의 '너도' 엄마가 나를 지칭하는 말이고 '나도' 내가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나의 지난 시절이 보는 사람도, 겪는 사람도 매우 안타깝고 피로했다는 뜻이다.


'다사다난'하던 때를 통과하는 동안은 이 어려움의 끝이 보이지 않아 많은 감정과 상념들을 저 네 글자에 녹여낼 수가 없었다. 뭐가 더 있을지 몰라 그런 것도 있고 상황을 헤쳐나가느라 도무지 쿨타임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시간을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온몸으로 겪어낸 것인데도 도대체 어떻게 견뎌왔는지 아득한 예전의 일 같고 그렇다. 한껏 예민하고 잘 잊지 못하는 나는 나이들수록 이렇게 감각이 무뎌지는 게 좋다. 하나하나 기억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려운 일의 경중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겠으나 나도 나의 작은 그릇 대비 넘치게 많은 일들을 겪었다. 프린세스 메이커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곱게 키우려 애쓴 딸이 산전수전을 겪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는 더 애가 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딸은 큰 사고를 치지는 않지만 고래심줄 같은 고집을 가지고 있어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본인만 알고 느끼는 9부능선을 넘어서야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는 강성 똥된장테스터(대략 먹어봐야 안다는 뜻)였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똥을 먹을 만큼 먹어보고, 토할만큼 토해본 것인지 더이상 크게 궁금한 것도 없고 대수롭지 않은 삶이 그렇게 미치게 답답하지도 않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았던 시기가 지나가고 나니 그렇게 좋을 것도 그렇게 싫을 것도 없다. 무언가를 뜨겁게 좋아할 만큼 마음의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는 게 가끔은 좀 아쉽긴 하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를 너무 싫어하지도 않게 된 지금의 상태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다사다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기쁨의 순간도 많았지만 미움의 시간을 견디는데 에너지를 더 많이 썼기 때문일까.


요즘 나의 마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늦여름밤의 서늘함 같다. 완전히 가을이 왔다가 깝치기에는 땀이 줄줄 나는 낮시간도 있지만, 해질 무렵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한 자락이 잊고 있던 감각들을 다시 일깨워주는 느낌이다. 너무 뜨거웠던 불과 얼마 전의 한여름 탓도 있겠지만 누그러진 이 더위와 슬슬 찾아올 타이밍의 각을 재고 있는 가을의 밀당이 꽤 마음에 든다. 부디 '다사다난'이 계속 과거형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란다. 삶이 늘 무탈할 수는 없으니 숨을 고를 시간을 조금만 넉넉하게 주길.


다음에 찾아올 '다사다난'을 다시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게 또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놓을 테니 지쳤던 내가 조금만 쉬었다 갈 수 있게 허락해주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