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사람 다 됐네
나에게 회고라는 단어는 조금 더 깊고 아련한 느낌이건만 스타트업에서는 어떤 일을 끝내고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 있어 좋았던 점, 나빴던 점, 개선해야 할 점들을 나누는 것을 회고라고 표현한다. 정량적 지표와 효율에 미쳐있는 이과 나부랭이들(당한 게 많아서 감정이 좋지 않다 ㅋㅋ)이 회고라는 표현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대충 번역해서 쓰는 느낌이지만. 하지만 표현해 내는 단어의 깊이와 무관하게 나도 거의 2년을 스타트업 나부랭이(ㅋㅋ)들의 사이클에 맞춰져있다 보니 뭔가 마무리를 할 때는 회고를 해야 할 것만 같다. 잔뜩 꼬여 있는 나의 심보와는 달리 그래도 어떤 시간을 마무리할 때는 나름 필요한 절차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아직 완벽하게 끝을 낸 게 아니라서 회고를 말하기엔 이르나 그래도 담담하게 끝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간략하게나마 정리를 해두는 건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주로 끝을 내는 쪽의 경험을 더 많이 했던 나로서는 새로운 끝을 앞두고 나에게 있었던 여러 번의 마무리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큰 줄기는 다 비슷하다. 처해있는 지금에서 벗어나고 싶고, 알 수 없지만 다가올 미래에 나를 좀 더 맡기고 싶을 때. 어떤 때는 '싫어져버린 지금'의 반동이 큰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의 울림이 더 컸던 적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약간이라도 한쪽에 대한 쏠림이 있었는데 이번 끝은 기분이 좀 다르다.
이번에도 역시 '싫어져버린 지금'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 둘 다 공존하지만 필라테스 기구인 보수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을 때처럼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을 망정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느낌이 아니라서 적당히 좋고 적당히 두렵고 적당히 기대된다. 불안은 나의 영원한 친구이며, 안정이라는 것은 신기루이자, 미래는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드디어 받아들이고 끌어안게 된 것일까. 예전의 나라면 "미쳤구나"할 정도로 대책이 없다. 나름의 대책을 세우고 준비하면서 애를 썼던 때가 훨씬 더 많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않았던 경험들 때문일 수도 있겠다.
종종 후배들에게 커리어나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 어떤 게 나랑 맞는지 정답을 알 수 있게 될 줄 알았으나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여러 번의 선택과 결정 등을 수습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인생이 '진짜로' 내 마음대로 잘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간혹 심술 맞은 선생님들이 시험문제 출제할 때 '다음 내용 중 맞는 것을 모두 고르시오' 해놓고 '맞는 답 없음' 이런 걸 5지선다에 하나씩 넣어놓아서 '에이, 설마'하고 그 선택지는 제쳐놓고 틀린 답과 씨름하다가 결국은 OMR카드 잘못 써서 바꾸다가 종 치고 울고...
좋아하는 일을 했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열심히 일한 돈으로 와인도 사 먹고,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었다. 2년 가까이 이놈의 회사에 푹 절여져 있었던 것 같다. 늘 그렇듯 나는 최선을 다했고 이번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가 가진 역량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회사에 처음 올 때 일기장에 적었던 것처럼 또 다른 것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이 울타리 바깥에서 이런저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다시 가볍게 시작해 봐야지. 초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백수가 되고 싶으니까 비도 좀 덜 오고 무더위도 조금 늦게 시작하면 좋겠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