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의 기술이 서른여섯 개가 되는 그날까지
저 멀리서 근심의 먹구름이 몰려온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신발끈부터 고쳐 맨다. 냅다 도망쳐 버리기 위해서다.
어렸을 때는 그 먹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온몸으로 겪어내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고 피하는 방법도 몰랐다. 울어도 보고, 술도 먹어보고, 아무 죄도 없는 친구들을 붙잡고 하염없이 하소연도 해보고, 온갖 못난 짓을 다 하고 나서야 긴 터널 같은 시간은 비로소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겪어낼 정신력도, 체력도 안 되는 요즘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비틀어 스트레스를 피하려 애를 써본다. 근심의 먹구름 아래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은 나이가 들어서도 무섭고 두렵다.
우선 몸을 굴려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생각들로부터 도망쳐본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을 때 운동을 시작했다. 내 몸 하나는 그래도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까 싶어서.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가끔은 이것마저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느냐며 당겨오는 근육을 붙잡고 슬퍼했다. 그래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속된 말로 근육을 ‘조지며’ 생각의 꼬리를 뎅겅 잘라낼 수 있었다. 고민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같은 문제도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가끔은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겪고 있는 어렵고 무거운 일을 가볍고 하찮게 여기고 싶으면 역사책으로 도망가는 것도 좋았다. 그 일을 기억하는 특정한 누군가의 기록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결국 인간은 모두 다 죽고 아주 극히 일부만 역사로 남게 된다. 나라를 바로 잡겠다며, 권력을 잡아보겠다며, 대의를 지키겠다며 다들 큰마음을 먹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 역사적인 인물이 되지만 그들 모두 다 죽고 없다. 하물며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도 고작 몇 줄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데 내가 지금 겪는 이 근심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런 생각이 들면 갑자기 고민의 무게가 가뿐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뭐라고. 뭐라도 되겠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저 멀리 감춰 두었던 정신승리 카드를 조용히 꺼낸다. 그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을 겁 없이 정면승부 하던 시절에는 자기합리화를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비겁해 보였다. 자기객관화를 못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망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적절한 자기합리화로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며 죽음의 계곡을 잘 건너간 사람들은 또 다른 모습의 승리를 거둬가고 있었다. 오히려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정답을 구하려 몸과 마음을 갈아 넣던 나의 회복이 더뎠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함부로 정신승리를 하곤 한다. 고민하다 죽느니 살아남아서 고민하려고 그런다.
그런데 가끔 이런 방법들을 다 써서 있는 힘껏 도망쳐도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그럴 때는 온 힘을 다해 그 자리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다.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참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애써 누른다. 그냥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재생으로 듣고, 방에 꽃도 좀 꽂아놓고, 좋아하는 케이크 한 조각 사서 먹고,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아주 작은 것들은 나에게 조금씩 주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 머리 위의 먹구름이 잠깐 지나가는 것일지 기나긴 장마철의 하늘일지 그 밑에 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어떻게든 지나간다는 것이니까. 그 사실 하나만 믿고 버티는 것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도망의 잔기술이 통하지 않는 문제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도 질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도망의 기술을 연마하여 열심히 줄행랑칠 작정이다. 피할 수 없다면 몰라도 피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겪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30대 중반의 결론이다. 지금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니 내 나이만큼 딱 서른여섯 개의 기술만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크든 작든 세상의 다양한 각박함이 몰려올 때 골라서 꺼내 써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한 살 먹을 때마다 그 기술이 한 개씩 늘어갔으면 좋겠다. 그럼 일흔 살 때쯤 되었을 때는 나는 세상의 근심을 적당히 방어해내는 꽤 너그럽고 여유 있는 할머니가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너무 멋있다. 부지런히 도망쳐서 잘 늙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