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일제문소 May 03. 2021

이유를 말해주는 디자이너

너와 나의 티키타카

제가 하는 일은 굳이 따지자면 기획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물로 구현해줄 직군의 사람들과 붙어서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비주얼로 표현할 일이 많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이랑 제일 자주 일을 하곤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디자이너들을 좋아합니다. 말과 글로 후리는(?) 저와 다르게 무언가를 직접 심지어 그것도 보기 좋게 만들어낸다는 자체로 너무 선망의 대상입니다. 일하면서 만난 디자이너 절친들도 많고요.


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 요소들을 사부작사부작 얹어 거북목에 퀭한 눈으로 뭔가 만들어오는 걸 보면 옆에 앉아서 수발이라도 들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리고 높은 분들의 뜻에 의해 내가 봐도 엄한 수정사항을 들고 갔을 때, 받아들고 한숨을 푹 쉬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하고 애쓰고 있을 때는 괜히 사탕 하나 놓고 가고, 커피 하나 놓고 가고 주변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얼쩡댑니다. 내가 그런 건 아닌데 미안하거든요.


하지만 이런 마음은 그들 스스로가 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디자인 결과물을 가져오는 디자이너에 한해서입니다. 가끔씩 뜨악하는 결과물을 가져와서 입을 꾹 닫고 아무것도 설명을 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에는 _최종.jpg 무간지옥에 가두고 싶습니다. 저는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너 이거 왜 이렇게 했어?????"하는 추궁에 대한 답변이 아니고 '요새 모바일은 이런 식으로 많이 해요. 배경이 어두워서 폰트 컬러는 이렇게 해야 잘 보일 것 같은데." 정도의 리서치와 제작의도 정도가 궁금합니다.


일을 하면서 기뻤던 순간들을 기록해보겠다고 일단 던져두었으니 함께 일했을 때 정말 좋았던 디자이너 동료들과 그들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의견을 말해주는 디자이너

A는 저와 동갑내기 절친 디자이너입니다. 웹 에이전시에서 만났습니다. 동갑에 비슷한 처지라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도 있겠지만 저는 A가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는 디자이너라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쫄보 기획자라 디자이너가 적극적으로 의도와 배경을 설명해주면 몇 수 접고 들어갑니다. 아무리 제가 전략이고 논리고 설명을 해도 그들의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따라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한 번은 주로 웹 작업을 하던 그녀에게 인쇄 제작물 일이 맡겨졌습니다. 안해봤던 일이 아주 타이트한 일정에 주어졌지만 A는 엄청 공부를 해가며 결국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A를 보면서 역시 잘하는 놈은 채널 가리지 않고 뭘 해도 잘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요. 그리고 디자이너에게는 '보는 눈'이 킬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는 눈이 있는 애들은 어떻게든 그걸 만들어냅니다.


본분을 잊지 않는 디자이너

B는 저보다 네 살 어린 제품 디자이너입니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조용하게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편이지만 언제나 그 중심에는 소비자가 있습니다. 회사의 많은 일들이 일을 위한 일, 컨펌을 위한 결정이 되곤 하는데 꼿꼿하게 본인의 생각을 말할 때 반할 뻔했습니다. 상업 디자이너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작가정신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회사를 나온 이후에도 B에게 몇 번 일을 맡긴 적이 있었는데 책임감을 가지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주는 것을 보고 점점 더 탐이 나는 친구입니다. B의 포트폴리오를 받아본 적이 있는데 저는 지금까지 제가 본 포트폴리오 중에 최고로 꼽습니다. 작업물의 퀄리티도 퀄리티지만 프로젝트를 통해서 디자이너로서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적어둔 것을 보고 '넌 뭘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획의도를 잘 파악하는 디자이너

C는 저보다 세 살 많은 영상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이너라는 와꾸에 맞춰넣다 보니 영상 디자이너라고 표현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PD입니다. A랑 같은 회사에서 만나서 일을 하다 B와 함께 다녔던 회사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C는 기획에 대한 감각이 있는 제작자라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어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과 C가 만들어주는 결과물의 갭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획과 제작이 하는 생각의 싱크를 맞추는 것이 이 일의 시작인데 그것을 맞추는 데 들이는 에너지를 온전히 제작에 쏟을 수 있어 손발이 짝짝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서로가 쪼랩일 때 에이전시에서 개고생을 하다 큰 회사에서 다시 만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서로 뭔가 내심 뿌듯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물도 아주 좋은 영상으로 나와서 제가 했던 일 가운데 가장 손에 꼽는 작업으로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의 티키타카

막상 쓰고보니 기획자로서의 좋아하는 디자이너 취향을 늘어놓은 것 같지만 확실히 저는 직무가 다른 사람들과의 티키타카를 좋아하는 성향인 듯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니!'하는 부분에서 저의 세상이 확장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붕 뜹니다. 게다가 그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만나 하나의 일을 위해 시간과 마음과 역량을 써서 나온 결과물을 보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일의 순서 때문에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서로 빈정이 상하기 쉬운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런 오해 없이 일을 잘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좋은 피드백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들을 명확한 이유와 근거를 들어 좋은 태도로 말한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여기는 상대방의 의견을 꼬아듣지 않고 그저 일을 위한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태도가 전제 되어야 하고요.


저부터 '이런 느낌적인 느낌' 따위가 아닌 디자이너들이 수긍할만한 피드백을 주어야겠다고 늘 다짐합니다. 레퍼런스 이미지 만도 못한 글보다는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너무 어려운 일이라 주절주절 메일을 쓰다 결국 핀터레스트를 열게 되지만 내일도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기쁘게 일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네요.

앞으로도 이어질 게 많아야 할 텐데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팀장이 곧 회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