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아빠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혼 10년 만에 낳은 첫딸 큰고모 이후 5년 만에 본 장남의 밥에는 인삼이 올라갔고, 장남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에서 공부를 제일 잘해서 도시로 유학을 가 13살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방은 당연히 방 같지도 않았으며 종종 지붕이 날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 1, 2, 3을 차례로 데려와 같이 밥을 해 먹으며 학교를 다니고, 그러다 서른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 노총각으로 있다가 옆동네 아가씨랑 선을 보고 눈이 맞았다. 딱히 일도 안 하고 엄마 가게나 보며 낭창하게 살던 아가씨는 서울에서 일하는 털북숭이 같은 남자에게 반해 졸지에 맏며느리가 되어 개고생을 하고… 시대극에 종종 나오는 우리 또래의 아버지들이 갖고 있는 서사다.
모든 세대들이 각자의 시대가 제일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는 우리 아빠 세대들이야말로 세상의 변화를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겪은 세대가 아닐까. 이렇게 남처럼 얘기하니까 그 세대가 겪은 어려움이 이해가 가고 존경하는 마음이 드는데 정작 현실은 다르다. 자주 아빠를 형용하는 표현은 “아빠 왜 저래?”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하드웨어도 그렇고 소프트웨어도 그렇다. 엄마적인 면모가 튀어나오는 것은 여자로서 나이가 들면서 보이는 것이 많고 OS가 그냥 아빠다. 얼굴도 크고 선이 굵은 것까지 닮은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엄마가 니네 둘은 목덜미까지 닮았다고 했다.
외형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성격이 더 문제다. 일단 외부 자극에 매우 민감하고 잠을 설치며 표현을 잘 안 한다. 스트레스를 푸는 법도 잘 모른다. 굉장히 원칙주의자이고 강강약약이다. 엄마 표현으로 회사에서 물건 100개를 만들라고 하면 일단 알겠다고 하고 나중에 80개 밖에 못 만드는 상황을 말하면 되는데, 대쪽 같은 전과장은 지금 컨디션에서 100개 못 만들면 못한다고 말하는 타입이라 출세를 못했다고 한다(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 엄마가 아빠 좀 쪼다 같다고 했다). 큰 야망은 없고 분수에 맞게 사는 것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주는 대로 먹고 매일 똑같은 거 먹어도 큰 불만이 없다. 이걸 쓰면서도 너무 자기소개서 쓰는 느낌이라 좀 짜증 나고 눈물이 나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과도하게 강해서 가족구성원이면 좋은데 남이면 별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식에게는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라서 좋은데, 그 책임감이 원가족에게도 너무 강해서 와이프 입장에서는 매우 별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인이 꾸린 가족에 대해서도 굉장히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딱히 또 불평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평생을 비빌 언덕 없이 살아 극도로 몸을 사리다 보니 아무래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질러줘야 하는 굵직한 결정들은(아빠 출장 간 사이에 서울로 이사 전격 결정,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지금 사는 집 구입 등) 엄마가 하게 되는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단 반대부터 하다가(...) 진짜 결정이 되면 군말 없이 따르고 함께 책임을 진다.
나와 아빠 둘 다 서로 그렇게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보니 뭔가 다정함이 마구 느껴지는 에피소드는 별로 없는데 아주 오래된 나무 기둥 같은 기억들은 몇 가지 있다. 고3 때 야자 끝나고 매일 아빠가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던 일, 재수할 때 매일 아침 국기원 횡단보도 앞에 내려주던 일, 본인을 위한 돈을 진짜 만 원도 안쓰면서 내가 해외여행을 간다고 할 때 엄마 몰래 꿍쳐놨던 수십 만 원을 줬던 일 같은 것들. 내 성격상 아빠가 “공주님” 어쩌고 해도 “아빠 왜 저래?"하고 뚱하게 응수할 게 뻔해서 그런 다정함을 원하지도 않지만 외부인이었던 동생 와이프가 ‘아버님 엄청 다정한 스타일이세요.’라고 해서 새삼 아빠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빠만의 다정함이 있나보다.
엄마도 엄마지만 아빠를 보면 좀 더 속이 복잡하다. 새로운 걸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엄마에게는 뭐든 서포트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오히려 원하는 게 분명하고 많으니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크게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돈이 드는 건 뭐든 안 하려고 하는 아빠를 볼 땐, 고단했던 삶이 그에게서 총천연색 컬러를 뺏어가고 흑백만 남긴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아프다. 태어나보니 그의 딸이었던 나도 거기에 일조를 했겠지. 그리고 아빠도 지금 내가 쓰는 것처럼 나랑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본인이랑 똑같이 생긴 딸내미가 입 꾹 다물고 자기 인생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아등바등하는 게, 그걸 모른 척 옆에서 지켜보는 게 힘들지 않았을까.
이런 나의 아버지가 올해 일흔이 되었다. 목소리 크고 짱짱할 것만 같았던 아저씨가 정말 할배가 되었다. 스스로 애써 부정해 보지만 누가 봐도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아직 자식은 없지만 나이가 든 자식이 되어보니 어떤 사람은 다른 어떤 사람의 수고로운 인생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흔이 된 딸은 무얼 더 해줄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급하다. 늘 그걸 염두에 두고 사는 건 아니지만 불현듯 늘어가는 부모의 나이를 자각할 때마다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더 체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그 일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맥이 풀린다.
나는 무얼 하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좋은 걸 해주자는 마음이라 원래는 좋은 호텔에 가서 가족끼리 식사를 할까 했었다. 어차피 아빠는 뭘 해줘도 돈 아깝고 싫다고 할 사람이라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걸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거 말고 아빠가 좋아하는 거. 아빠의 원가족, 본인 형제들 불러다가 주구장창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어린 시절 얘기하면서 술 한 잔 하는 거다. 아빠의 새 가족(?) 입장에서 솔직히 좀 싫었지만 세상 발랄한 목소리로 지난 주말 고모들과 작은아버지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작은 아빠,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이번에 아빠 칠순이셔서 가족들 모여서 식사 한 번 하려고요.”
주문한 케이크 토퍼 문구에 ‘인생은 70부터'라는 뻔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오늘 아침에 발주를 넣었는데 이미 발송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공장형 디자인에 뻔하고 흔한 문구인 것 같지만,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
지금 할 수 있는 제일 즐거운 것들을 아빠가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