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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Jul 01. 2024

언젠가 하겠지

아니 절대 안 할걸

어릴 때 곧잘 하던 귀걸이들을 한 움큼 버렸다. 뚫었던 구멍이 막힐 정도로 오랫동안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기도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관했던 것들이었다. 무슨 무당집도 아니고 알록달록 곰돌이에 고래에 나비에 요란한 장식들도 있지만(이런 것들이 어울렸다는 게 더 놀라움) 지금 해봐도 괜찮을 것 같은 심플한 것도 있어서 다 널어놓고 한 번씩 다시 착용해 봤다. 결론만 말하면 20%도 못 건졌다. 이제 갓 대학에 가는 동생이나 후배가 있다면 주고 싶은데 이제 내 주변엔 그만한 또래가 없다. 사촌동생도 대학교 졸업반인 마당에 있을 리가. 이 정도쯤은 괜찮지 않을까 했던 것도 묘하게 안 어울리고 오히려 그땐 너무 나이 들어 보여 손이 잘 가지 않았던 심플하고 심플한 몇 개만이 살아남았다.


사람의 이 ’ 나이 들어 보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단순하게 피부나 머리숱으로만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분위기라고 말하기엔 너무 넓고, 기운이라고 하기엔 체력에 좀 기대는 느낌이 있다. 오히려 태도와 욕망에 좀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태도는 자연스러워지고 욕망은 좀 균일해지는, 기울기가 좀 완만해지는 것에서 나이의 ‘바이브’가 나오는 것 아닐까 싶다. 뭐든 몸에 걸치는 것은 편한 것이 제일이고 내 눈에 예쁜 것도 예쁜 것이지만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남의 눈에 예뻐 보이고 싶은 이글이글한 욕망이 귀찮음, 체력 등의 이슈로 급격히 감소하여 젊고 탄력이 좋던 욕망의 시절에 구매한 것들이 세상 부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 그 욕망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으면 버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챕터가 끝났다는 걸 완벽하게 인정해 버리면 그게 얼마가 되었든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다음 스테이지에도 그 무대만의 새로운 태도와 욕망이 있다. 지금 내가 쇼핑을 또 왕창 하고 있다는 개소리를 너무 거시적으로 아름답게 하고 있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지금의 내 태도에, 내 욕망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있고 추구미가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 경우에는 뜨거운 시기보다는 돈이 많이 들긴 한다. 예전에는 옷에다 내 몸을 맞춰보려 애썼다면(물론 성공해 본 적은 없다) 이제는 그런 일은 없다. 하루종일 불편하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면. 무조건 좋은 소재의 편한 옷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한 옷만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좋은 소재의 편하면서 제법 멋도 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어렵다. 그런 옷은 비싸다. 어른들이 나이 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얘기를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충 나라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에 대한 DB가 좀 쌓였지 않나. 숱하게 남아있는 망한 사진들과 진정한 친구들의 짤 없는 피드백을 받아봤을 거다. 이제 대략 보면 안다. 아, 저 옷은 되겠구나. 이건 안 되겠구나. 그러다 보면 옷장에는 비슷한 옷들로 가득 차게 된다. 물론 하늘 아래 같은 레드 없고, 화이트 티셔츠도 다 같은 화이트가 아니지만 대략 그 옷이 그 옷이다. 그럼 또 다른 스타일에 대한 욕망이 올라오고,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홧김에 스타일을 바꿔보겠다며 지르고, 또 망하고… 계속 사고 계속 망하는 패턴은 비슷한데 관점이 좀 다르다. 어릴 땐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게 좀 더 컸더라면 지금은 내 눈에 예쁜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내가 이 시도를 한 게 너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 결국 회전문처럼 원래 입던 스타일을 또 줍줍… 내 인생 계속 어렵다.


사실 나는 못 버리는 것보다는 버릴 생각을 못하는 것에 가까운 편이다. 곤도 마리에 아줌마처럼 여전히 설레서 못 버리는 게 아니고 몰라서 못 버리는 것에 가깝다. 귀걸이도 어딘가 처박아 놓고 있다가 서랍정리를 하면서 발견한 거다. 그 빈도가 잦지 않을 뿐이지 버릴 때는 생각보다 미련 없이 싹 다 버린다. 아니다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아깝다는 생각도 잘 안 들고 당근으로 팔지도 않는다. 누굴 주면 줬지. 지나간 일들도 그렇다.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때는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도 안중에 없으면 없었던 일 같다. 분명 내가 겪은 일인데 너무 남의 일처럼 생경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때 너무 가깝고 너무 뜨거웠던 사람이었어도 지나가고 나면 저 사람이 누군가 싶을 정도로 몰랐던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차가움이 아닐까 한다. 지나간 일과 사람에 대해서 갖는 끝나버린 마음. 내가 동경하는 차가움은 사실 이런 게 아니고 균형 잡힌 마음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뭐 그런 건데 태생이 이렇다 보니 그건 잘 안된다. 그런데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기본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뜨거워봤고, 그걸 다 태우고 나면 ‘아, 이건 끝났네?’하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다른 산에 불 지르러 갈 수 있으니까. 그 선선한 홀가분함이 좋다. 마흔쯤 되니까 그 선선함의 빈도가 좀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아닌 것들을 조금 더 빨리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닌 걸 알면서도 혹시나 혹시나 하고 부여잡고 진상을 부렸는데. 지금은 내 손에 잡히는 것, 내 품 안에 들어오는 것이 더 소중하다. 어떤 것이 내 품을 떠나도 또 다른 좋은 것이 온다는 경험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아니 뭐 꼭 내가 요즘 새 옷을 잔뜩 사고 오늘 엄마랑 백화점 가서 쇼핑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맨날 하루하루 똑같은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다 각각의 시간들이 어떤 챕터에 들어가 있고, 다음 챕터가 기다려지기도 한다는 그런 아무 말을 하려는 것이다. 어린 친구들에게 30대 진짜 짱이라고 최고라고 했는데 왠지 40대도 개짱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언니들이 없어서 물어볼 데는 없지만 내가 또 살아보고 얘기해 줘야지. 어휴, 트렌드 세터의 삶이란. 스물아홉에서 서른 넘어갈 때는 약간 모르고 당한 느낌이 있는데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가는 건, ‘오케이 알겠어. 들어오슈’하는 느낌이랄까. 스타일 바꾸려다 반품도 안 되는 옷처럼 또 다사다난하겠지만 이상하게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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