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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Aug 14. 2024

호언장담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게 달려와줘

호언장담이 듣고 싶을 때가 있다. 막상 그런 소리를 들으면 아마 나는 눈을 흘기며 “웃겨. 진짜" 하고 가볍게 면박을 주겠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고마워' 라고 말할 것이다.


걱정이 많은 나라고 대단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별다른 대책 없이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마치 그것이 나의 인생인 양 마음이 놓인다. 내가 오랫동안 많이 좋아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인생을 나사 조이듯 사는 나에게 약간 나사 풀린 채로 호기롭게 잘 사는 사람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트인다. 숲을 향해 뻥 뚫려있는 통유리창 같다. 걱정과 대비는 내가 다 할 테니 그런 사람들이 나의 곁에 더 많이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 때 듣는 노래가 있다. 윤상, 아니 정연준의 <파일럿>이다. 연식 너무 나와서 좀 속상하지만 다시 만나줘 업타운 정연준 맞다.


1993년에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파일럿>의 OST인데 내 천년의 이상형, 이제는 만인의 시아버지, 라이즈 앤톤의 abn(아버님)이 되어버린 윤상 오빠의 곡이다. <파일럿>에는 지금은 저 조합이 가능한가 싶은 최수종, 한석규, 채시라 같은 배우들이 떼로 나왔고(심지어 김혜수가 서브여주였다) 보잉이 비행기 회사인지도 몰랐으면서 기억하는 보잉 747, 비행기 조종사, 스튜어디스 같은 직업도 너무 신기했다. 10살짜리 나의 눈에는 채시라가 최수종이랑 헤어지고 프랑스 파리에 파견근무를 간 것도 너무 멋있었다.


https://youtu.be/tBJYyqgZh68?si=sJy5fStigsPuRLcD

태조 왕건...아니 최수종이 청춘스타이고 한석규도 서브남주이던 시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라마 시작할 때 나오는 이 노래가 너무 좋았다. 인트로만 들어도 심장이 뛰는 느낌. 뭘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을지악보라는 곳에서 1장짜리 악보를 피스라는 이름으로 팔았었는데 <파일럿>의 악보를 사서 뚱땅뚱땅 쳤던 기억도 있다. 그 이후로도 이 노래는 때로는 P2P 사이트에서 어렵게 구한 MP3로, 싸이월드 BGM으로, 멜론의 플레이리스트로 변모해 가며 아직도 나의 곁에 있다. 나는 아직도 힘을 좀 내야 하는 순간에는 이 노래를 듣는다.


며칠 전, 이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갑자기 윤상이 직접 부른 파일럿 영상을 피드에 띄워줬다. 트민녀인 내가 최근에 뉴진스 따라간다고 뉴잭스윙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는데 그 안에 업타운 노래가 좀 섞여있었나 보다. 내가 늘 듣던 ‘우리 오빠들’ 노래에 업타운 정연준이 묻어버린 결과, 정연준 인터뷰 뒤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작곡가 윤상 본체가 직접 부른 <파일럿> 몇 소절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나는 왜 여태 이 영상을 몰랐지.


https://www.youtube.com/watch?v=7_584IIn6O8

심지어 파일럿 원곡의 백보컬은 장혜진이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랫동안 들어온 노래인데 왜 이렇게 새삼스럽게 다가왔을까. 이 곡의 힘찬 맛(?)은 원곡 가수가 훨씬 더 잘 살려주는데 만든 사람이 부른 노래 몇 소절이 다시 나를 이 노래에 과몰입하게 만들었다. 요즘 가요 카테고라이징에 따르면 이 노래야말로 '벅참류 갑'인데. 나에게 이 노래는 무언가를 호언장담하는 듯한 노래였다. 인트로의 신시사이저 멜로디를 들으면 근심, 걱정을 떨치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달까. 그리고 30년 동안 들어온 게 무색하게 다시 이 가사 한 줄에 꽂혀버렸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게 달려와줘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게 달려와줘'라니. 사실 이 문장의 포인트는 '내게 달려와줘'인데 나에게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라는 말이 더 깊고 강력하다. '어떻게 아무것도 생각을 안 해... 그게 말이 돼...?' 하지만 이런 호언장담은 그 누구보다도 그러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말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 흔한 기교도 없다. 교포오빠 특유의 그루브가 있는 정연준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너무 정직하게 찍어내는 리듬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화성. 노래가 너무 정직하게 치고 들어오니까 노래의 감정 뒤에 숨을 방법도 없고, 듣는 사람의 감정만 남겨 놓으니 그걸 마주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뿌엥'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일, 그런 사람 따위는 없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알지만 나를 잘 아는 친구의 말마따나 스스로의 티끌을 못 견뎌하는 나라서 마음이 담긴 누군가의 호언장담은 울림이 더 크다. 다들 나이가 들수록 이 꼴 저 꼴을 다 보니 점점 그렇게 큰소리치는 사람이 줄어들지만 가끔은 그런 호기로운 말이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대로 안되면 뭐 어때. 어차피 사람 일은 마음대로 안되는데.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준 통 큰 마음과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뻥 뚫린 나와 우리의 시간이 중요하지.


10살 때의 기억과 감정이 아주 선명한 것은 아니지만 40살이 되어도 이 노래가 여전히 내 마음을 뜨겁게 하는 걸 보면 아마 30년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친구 키미에게 이 노래를 나의 장례식 BGM으로 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이 노래의 비트처럼 정박으로 힘차게 살다가 "얘들아 인생 별거 없더라. 더 씩씩하게 살다가 만나자!"하고 당차게 죽어야지. 이상하게 브런치에 글을 쓸 때마다 나의 불안하고 유약함을 토로하게 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이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나의 가장 큰 용기이자 호언장담이 아닐까 한다.


호기로운 말들을 기대한다고 여태 말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거다. 앞으로도 지키지 못할 약속은 입에 담으려 하지도 않을 거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경계하겠지. 그래도 사람들이 나에게 단호하고 단단하게 좋은 말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겁이 많은 내가 나를 지키려 너무 강한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 단단한 좋은 말 뒤에 좀 숨을 수 있도록, 그냥 이 흐물텅한 물만두 본성 그대로 살 수 있도록. 그 말들로 힘을 내서 언젠가 약속했던 저 달로 날아오를 수 있게 말이다.


그것이 끝이라고 우린 믿지 않았지
너 떠난 텅 빈 활주로에 쏟아지던 너의 목소리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날 예감을
해맑은 웃음 지으며 대신한 너의 슬픔을

오해는 이제 그만 상처 주는 일도 그만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게 달려와줘

너를 뜨겁게 안고서 두 팔이 날개가 되어
언젠가 네게 약속했던 저 달로

우리 푸른 꿈 싣고서 한없이 날아오를게
사랑해 너를 하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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