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 되는 거 한다...
지적당해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잔소리가 있다. 내비게이션이 말해주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이 잔소리가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지가 알아서 바로 다른 대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대안을 마련해 주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삶이라면 이쪽으로도 가보고, 저쪽으로도 가보고 할 텐데. 보통 그런 옵션이 많이 주어지는 삶은 드물다. 일단 확실한 건 나는 아직까지 그런 삶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책임감 있고 성실한 부모님을 만나 큰 사고 없이 보호받고 살 수 있었던 것 또한 큰 축복이지만 그렇다고 엄청 아쉬운 소리를 하고 징징댈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타고난 환경은 바꿀 수 없으니 그렇다 치고, 타고난 성향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경로'라는 것을 흔히 말하는 '정상성'에 비유한다면 나는 그 경로에 대한 집착과 좌절이 컸던 사람이었다. 좁은 땅덩이에 늘 서로를 볼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워낙 보수적이고 바뀌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길'을 따르고자 했고, 그러지 못했을 때의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예를 들면 대학에 가야 한다, 결혼을 해야 한다, 대기업에 가야 한다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웃긴 것은 나는 이런 경로 집착녀이었음에도 그 어떤 것도 제때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쿨하게 걷어차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늘 그 경로를 따르지 못한 것에 전전긍긍하면서 자꾸 남들이 안 가본 샛길로 가는 나라는 애매한 소형 SUV를 자꾸 그 길로 갖다 놓으려고 애썼다. 근데 또 어찌어찌 애를 쓰다 보면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경로, 큰길의 언저리에 와 있다. 그래서 '이제 됐구나'하고 또 한시름 놓을 만하면 다시 길을 잘못 들어버리고... 부모님의 보호를 벗어나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이래로 내 인생은 계속 경로를 이탈해 왔다. 시도와 좌절의 아이콘이 될 생각도 없거니와 나도 이제는 너무 진이 빠진달까. 그리고 내가 '은전 한 닢'처럼 갖고 싶어 했던 그 '정상성'이라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 같다.
남들하고 다르게 사는 게 귀찮고 피곤했던 나의 방패였을 뿐,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오히려 더 수월했을 인생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선택 또한 내가 한 것이고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누가 등 떠밀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 나의 결정이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살 수 없을 것 같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인생도 ESG 경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떻게든 하면 된다고 밀어붙이니까 지금 기업이며 지구가 다 요 모양 요 꼴 아닌가. 열심히 했는데도 내 인생이 이만큼이고 기대에 못 미친다면 나도 이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 너무 길어서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을 적용하고 시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원툴로 100년 사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내가 알던 경로가 아닌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려고 한다. 내비게이션은 '경로를 이탈하였'다고 염불을 외겠지만 내가 도착하는 곳이 목적지려니 하고 되는대로 가볼 예정이다. 세단 타고 곱게 잘 닦인 길을 가고 싶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길이 오프로드 비포장도로라면 내가 차를 바꿔야지. 자갈이 튀어서 긁혔네 어쩌네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다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진짜 남들 사는 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들으면 어이없을 정도로 너무 전형적인 삶을 꿈꿔서 지금의 모습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정말 사람의 인생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마음이 좀 편안한 건, 이전에 겪었던 숱한 경로이탈은 나에게 큰 좌절이었고 다시 정상경로로 돌아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더 쥐어짜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이 길이 내 길인갑다'하고 그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는 게 좀 고단해지고, 안 되는 게 많았던 덕분이다. 피곤해지니까 할 수 있는 것만 하게 된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