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라이트>
이 글엔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새벽과 아침 언저리, 아직은 어스름한 시간에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아파트 출입문을 열면 찬 바람만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 무언가 서글픈 그 길에 유일하게 위안을 건네는 것은 바로 하늘이다. 아침을 열려는 주황빛 여명이 저 멀리에서부터 짙은 쪽빛의 밤하늘을 밀어낸다. 아직 하늘은 푸르게 어둡지만 이내 붉은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그 찰나의 시간에 하늘을 마주한 채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그 하늘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길.
요즘의 새벽하늘처럼 채도를 높여 색을 감각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포스터부터 세 가지로 분절된 색이 돋보이는 <문라이트>이다. 이 영화는 포스터가 말해주듯이 세 가지 챕터로 구분된다. 각 챕터에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부제가 부여되는데, 이는 주인공 샤이론이 불리는 호칭이다. 각각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나타내며 그 시기에 겪게 되는 중요한 사건들을 따라 영화는 전개된다. 우린 그 흐름을 좇아가며 샤이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찾아가게 되는데, 그 의미는 그가 사는 마이애미의 햇살만큼이나 밝고 선명한 색들로 구성되어 있다.
빨간색
분노와 열정, 폭력으로 상징되는 붉은색은 샤이론의 엄마가 가진 표상이다. 샤이론은 빈민가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약에 취해있고 어린 샤이론을 돌보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가진 돈을 빼앗기도 한다.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샤이론의 집은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붉은 조명 아래 더 붉은 옷을 입은 엄마는 아들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표출한다. 샤이론은 집이 아닌 곳에서 지내는 일이 더욱더 많아진다.
녹색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수영을 가르치며 샤이론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후안. 자식을 외면한 엄마 대신, 샤이론에겐 후안이 아버지와도 같다. 부모의 부재를 후안을 통해 다시 회복하고, 처음으로 온전한 인간관계를 맺어가며 샤이론은 한 단계 성장한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회복이고 성장이다.
한편 녹색은 미숙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터렐의 폭력에 샤이론은 성숙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어른의 도움을 무시하고, 마찬가지로 폭력으로 대응할 뿐이다. 선명한 녹색 화장실 조명 아래 놓인 샤이론. 그의 얼굴에 드리우는 조명이 흐르는 피를 숨겨주지만, 어리숙함을 상징하는 초록빛은 그를 또 다른 폭력으로 인도한다. 화장실을 나선 샤이론은 터렐을 의자로 내려친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사람과의 관계에 미숙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케빈 외에 마음을 나눴던 사람은 없었다. 여린 내면을 숨긴 채 근육을 단련하고 금니 장식으로 자신을 과시한다. 시끄러운 차의 배기음과 음악 소리는 오히려 그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인이 되어 블랙이라 불리지만 그의 얼굴엔 여전히 녹색 조명이 드리운다.
파란색
샤이론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언제나 파란색이다.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도망치며 들어가게 된 허름한 창고. 그곳에서 샤이론을 구원하는 것은 하늘색 차를 타고 등장한 후안이다. 푸른 바다 앞에서 그는 케빈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느끼며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또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어린 샤이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우린 그가 이제 자유를 찾고 희망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각 챕터의 사이사이는 큰 시간적 격차를 두고 있다. 분절된 사건 때문에 그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관객들이 생각해봐야 할 몫으로 남겨진다. 색으로 따지자면 색과 색의 언저리가 어떤 그라데이션으로 칠해졌을지를 유추해봐야 하는 것이다. 가슴 아픈 상상이다. 샤이론의 삶은 고통과 외로움으로 점철되어왔다. 그의 과거가 어떠했을지 되돌아보는 것은 그의 아픔을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케빈과 다시 만나는 샤이론을 보니 그의 미래에는 희망이 드리운다. 언제나 말이 없고, 표현하지 않았던 샤이론이었다. 하지만 케빈을 만나기 위해 애틀란타에서 마이애미로 먼 길을 달려오고, 마침내 그를 만나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내비친다. 외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흘러만 갔던 그의 삶을, 이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구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빨간색, 녹색, 파란색은 빛의 삼원색으로 색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고 본질이 되는 색이다. 이 세 가지 색만 있으면 여러 조합을 통해 다양한 색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샤이론은 빛의 삼원색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진 색으로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 물들일지, 얼마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갈지 기대감이 생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이제는 샤이론이 직접 손에 붓을 쥐고 자신의 인생에 색을 칠해 나갈 차례이다.
<문라이트(Moonlight)>,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