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검정봉다리

by 시소


아아
아이.. 씨.. 피
웅웅 거리는 동굴처럼 좁은 욕실에
신음 섞인 고통소리가 울려 퍼진다
뿌연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서 피 한 방울이 물과 함께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하는 면도지만 쉽사리 자기 자릴 내어주지 않는다
흐르는 핏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면도를 이어간다
따뜻한 물의 온기로 금세 욕실 거울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손바닥에 치약을 조금 묻혀 둥근원을 그리며
거울을 닦아낸다
손에 비누거품을 내어 코밑에서 턱끝까지
수염선을 따라 거품을 낸다

쓰으윽 싹 쓰으윽 싹
얼굴 곡선을 따라 상하로 쓰윽 좌우로 쓰윽
촥촥촥촥!
흐르는 물에 면도기를 흔들어 수염 잔여물을 털어낸다.
오른손은 면도기를 잡고 왼손은 면도기가 지나간 길을 따라 아직 남아있을 수염을 깊숙이 베어낸다
수염이란 게 한쪽 방향으로만 자라 있는 게 아니어서
보기보다 면도가 쉽지만은 않다

면도가 마무리되어간다
양손에 흐르는 물을 받아 거울에 뿌린다
물때가 낀 거울은 가운데부터 서서히 깨끗한 제모습을 드러낸다
수건에 핏물이 스며들었지만 꾹꾹 눌러 물과 함께 얼굴을 닦아낸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면도가 잘됐는지를 확인할 차례다
깨끗이 잘려나간 수염이 자취를 감추었다

1초2초3초...
베어진 살깟위로 피가 송긋 올라왔다
전에도 그런 경험이 많다는 듯 휴지를 손톱만큼
떼어내어 피가 나고 있는 자리에 꾹 붙인다

면도가 끝나고 거실로 나온 나를 보며
와이프가 한 소릴 한다
"어째 당신은 하루 이틀 하는 면도도 아니면서
매번 그렇게 피를 내?"
"다음엔 내가 한번 해줘 볼게"

속으론 됐다야~를 말하고 있었지만
전에 한번 해봤던 악몽이 떠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신혼 때 와이프가 면도를 해준다며 내 얼굴을 난도질을 해놓은 적이 있어 다시는 남에 손에 내 얼굴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 상태인걸
와이프는 모르는 모양이다.



난 주말이면 아들과 함께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목욕탕엘 꼭 간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
목욕 후 아들과 함께 하는 해장국 맛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서다

아들이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난 언제 면도하는 걸 가르쳐 줄 거냐고...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식으로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줄 생각이다.






내가 어릴 적에도 주말이면 아버지는 우리 두 형제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엘 꼭 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목욕이 끝나고 나오시면 휴지를 얼굴 여러 곳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모습이었다
그땐 그걸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피가 멈추게 하기 위해 휴지를 붙인다는 걸
난 어른이 되어 알았다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운 면돗날이 양쪽으로 퍼져 나온.. 요즘은 그런 면도기가 흔치 않지만
예전엔 목욕탕엘 가보면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양날 면도기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역시 양날 면도기였는데
아마도 그렇게 얼굴을 자주 베이는 걸 보면
날을 자주 갈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욕실 선반 한구석에 있는 검은 비닐봉다리를 마주했다
묵직한 무게의 봉투는 뾰족이 튀어나온 물건들로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었다
봉투를 들고 나와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거꾸로 쏟아내었다
우르르 쏟아진 검정봉투 안의 물건은 수십 개의 면도기와 면도날이었다




내가 몇 년 동안 사다 드린 면도기와 면도날

면도기를 보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왜 저렇게 쓰지도 않으실 거면서
왜 그렇게 면도기를 사달라고 하셨는지
왜 다 쓰지고 못하고 저렇게 많이 모아만 놨는지
난 잘 쓰고 계신 줄만 알았어
난 다 쓴 줄 알았어 아빠.. 아빠.. 저거 왜 모아놨어?
저거 왜 모아 놨냐고
왜? 왜?
쓰지.. 하루에 하나씩 쓰지.. 쓰라고 사준 거잖아
그거 얼마 한다고.. 왜 안 썼어
막내아들 모아서 주려고 안 쓴 거야?
왜.. 왜
목놓아 울었다.. 한참을...



면도기와 면도날이 담긴 검정 봉다리 전부를
집으로 가져왔다
1년은 쓸 양이다
요즘은 전기면도기가 잘 깎이고 편해서 그걸 많이 쓰지만
난 요즘 날을 갈아 끼우는 면도기를 쓰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려 아침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 일러졌지만
난 그 시간이 즐겁다

아버지의 유품..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산
나에겐 소중한 아버지의 유산을 오늘도 만난다


난 매일 아침 아버지를 만난다
꿈속에선 아직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난 매일 아침 아버지를 만난다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지만 참으려 한다
난 매일 아침 아버지를 만나니까

면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내 아버지
날카로운 면돗날에 베이면 휴지를 붙이라고 알려주신 내 아버지
덕지덕지 붙인 휴지가 우스꽝스러웠던 내 아버지

난 매일 아침 아버지를 만난다
오래되어 무뎌진 면돗날에 베어
선홍빛 핏물이 입가에 흘러내려도
웃음이 난다
난 매일 아침 아버지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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