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소 Oct 01. 2021

놋그릇 이야기

할머니의 무용담

추석이 끝나고 제기 정리를 하다 옛날 생각이 문득 떠 올랐습니다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할머니는 꼭 저를 꼬십니다

치마 속 고쟁이에 달려있는 호주머니에서

300원을 꺼내 저에게 건넵니다


"오늘은 또 뭐할 건데?"

"나랑 놋그릇 좀 닦자"


할머니가 300원을 주실 때는 할 일이 많다는 일이란 걸 경험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역시나 쉽지 않은 일 일 거라는 걸 예상은 하였지만

말이 놋그릇을 닦자는 거지 광을 한번 뒤집어야

끝날 일이었습니다

옛날 한옥집의 일은 일 자체가 힘들다기보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짐을 다 내리고 올리고를 반복하는 그 과정이 짜증 납니다

그때 제 나이가 초등학생 때니 놀기 바쁠 때 이기도 하고.. 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에 남자는 여럿 있지만 매번 집안일은  차지입니다

광에 가서 안 쓰는 뒤주 위에 쌓여있는 짐들을 내리고 맨 아래칸을 차지하고 있는 상자를 꺼냅니다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땀은 벌써 비 오듯 쏟아집니다

내가 물건을 꺼내고 있는 동안 할머니는 지프라기 기와 덩어리를 준비합니다

딱히 생각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기와 덩어리라고 표현을 했지만 할머니는 그걸 애지중지 하셨습니다

할머니가 어디 가셨다가 기와 만드는 공장에서 얻어 오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와 위에 칠해있는 붉은색.. 그 원료 덩어리로 생각이 됩니다

얼기설기 뭉친 지프라에 그 비누만 한 덩어리를 물과 함께 묻혀 놋그릇을 닦으면 묵은 때가 잘 지워진다는 할머니의 믿음이 있으셨던 듯싶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힘 만들고 그리 잘 지워지지도 않았던 듯한데 번듯한 약품이 귀할 때라 할머니는

기와 위에 칠하는 그 화학원료가 때를 잘 벗겨준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지프라기를 새 걸로 갈아가며 닦기를 여러 번..

손톱 밑에 때 구정물이 새까맣게 끼고 나서야

반짝이는 놋그릇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할머니와 마주 앉아 놋그릇을 닦고 있으면

할머니의 옛날 무용담이 지루함을 달래주곤 합니다

왜정시대에 왜놈들이 마을까지 쳐들어와 집집마다 쓰고 있던 놋그릇을 모두 빼앗아 갔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왜놈들이 군사물자나 총알 같은걸 만드는데 쓰려고 귀한 구리가 섞인 놋그릇을 다 빼앗아 간 듯합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제사 지낼 밥그릇만은 지키겠다는 심산으로 몇 개의 놋그릇을 땅속에 묻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촛대며 향로까지 지금껏 있는 걸 보면 밥그릇 외에도 여러 가지를 땅속에 묻어둔 할머니의 센스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추석이 다가올 때면 제기며 갖가지 차례 용품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그 일을 엄마가 대신하고 있지만

놋그릇을 닦던 그 기왓장 원료도 놋그릇을 닦기 위에 뒷마당에 펼쳐 놓았던 멍석들도 이젠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버지가 재작년 돌아가시고 지금껏 4대 봉사를 해오던 제사를 형과 상의하여 이제는 반으로 줄였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모님까지 지내던 제사를

저의 대를 기준으로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만 2대 봉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오랜만에 아들에게  일 좀 하자고 꼬셨습니다


"왜.. 또.. 뭐 할 건데?"

"아빠랑 놋그릇 좀 닦자"

"놋그릇? 헐~"


놋그릇이 뭔지도 모르는 아들에게

제가 일을 같이 하자고 할 때는 살면서 꼭 알아야 할 것들과 집안 대소사 일에 관련된 것 들만을 같이 하자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나 다른 집에서는 몰라도 될 일 들이지만

아들이 하나뿐인 우리 집안에선 아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에게 제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엄마 돌아가시면 아버지와 엄마 제사상은 내가 좋은 유기그릇으로 싹 바꿔 상 차려 드릴 테니

그때 꼭 시간 지켜 아버지와 다녀가시라고"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돌아가신 후에 수백만 원씩 하는 유기 그룻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이렇게 정성 들여 제기를 닦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그렇게 헛된 시간만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2대 봉사만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증조부모, 고조부모님 올릴 술잔은 필요가 없게 되어 언제나 꺼내볼지 모를 제기들을 정성 들여 닦아 잘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이 한결 후련합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잘한 것처럼 홀가분합니다

오랜만에 놋그릇을 떠올리며 할머니를 추억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놋그릇 닦기..

그래서 제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나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매일 아침 당신의 책을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