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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Oct 12. 2022

양의 탈을 쓴 손녀와 할머니의 수상한 거래

계좌이체수업

우리 집 첫 손녀 이야기다

나의 엄마 그러니까 엄마의 기준으로 보면 손녀다

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딸이자 나의 조카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에

외손녀를 보시고 할머니가 되셨다

스무 살 나이에 시집와 첫째 딸을 낳고 그 딸이 서른이 되어 딸을 낳았으니

그 손녀가 스물다섯이나 된 오늘의 주인공 양아치 진희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

듬뿍을 넘어 땅에 내려놓지도 못하고 키우셨다

누나나 매형이 딱히 육아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알아서 키워 주셨다


최고의 메이커 옷, 최고의 먹거리로 정성 들여 키웠다

그 결과 나의 아들인 혁창이는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시촌누나 옷을 입고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 사랑이 내리사랑일 줄 알았던 우리는 오해라는 걸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째 손주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상은 간다

내 아들 혁창이가 애들 낳았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창조자가 됨과 동시에 내가 만들어낸 창조물들을 바라보는 그 기쁨은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사랑받고 자란 첫째 외손녀 진희는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누나의 딸이자

나에게도 첫 조카이니 당연히 삼촌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다


가끔 내 말을 거역할 땐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어느새 달려와 내 입을 틀어막고 줘 뜯고 난리가 난다


"마.. 내가.. 으이.. 너 어렸을 때.. 으이..

목욕도 시켜주고.. 으이.. 똥도 닦아주고.. 다했어.. 마"

이런 말을 꺼내면 바로 얼굴 빨간 순한 양이 된다..ㅋㅋ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호랑이 할아버지한테 옳은 말을 할 줄 알던 겁 없던 손녀였다

겁이 없다기 보다 개념이 없다는 게 좀 더 이해가 빠를듯하다


한 번은 김장을 담글 때의 일이다

엄마, 누나, 혁창엄마, 진희까지 모두가 김장을 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일 안 하고 누워서 땅콩 좀 볶아오라는 할아버지를 향해 독설을 날린 적이 있다


"지금 일하는 거 안 보여?

아니.. 땅콩이 먹고 싶어도 그렇지 지금 이 와중에

참.. 할아버지도 생각 없다.. 생각 좀 하고 말해"


그 순간 우리 모두 양쪽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얼음이 된 적이 있었다

호랑이 할아버지도 진희에게는 꼼짝을 못 할 정도여서 그 모습을 바라 보는 우리는 웃음이 더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 우리 집의 행사 때면 등장하는 단골 에피소드 메뉴가 돼버렸다



그런 조카가 지금은 자기의 최고 울타리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할머니 옆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며 숨만 쉬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하이에나, 이빨 빠진 호랑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2인자..

모두가 진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그런 조카에게 요즘 한 가지 수식어가 더 생겼다


동네에 있던 국민은행이 철수하는 바람에

엄마가 어렵게 배워놓았던 체크카드 ATM기 사용과 통장정리하는 방법이 모두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이제 엄마는 통장에 돈이 있어도 찾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공과금이나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들도 궁금함만 간직한 체 살아가야 한다


얼마나 불편하실까 생각만 하다

시간을 내어 엄마 핸드폰에 국민은행 앱을 깔아드리고 계좌이체와 입출금 내역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방법을 알려드리기로 하고 엄마 집에 방문을 하였다


앱을 다운로드하려고 하니 이미 설치가 되어있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국민은행 이미 깔려있는데?"

"몰라.. 난.. 저번에 진희가 뭐 만지고 하던데..."


국민은행에 들어가 보니 패턴이 걸려있었지만

1분도 안되어 잠금 패턴을 풀 수 있었다

잠금 패턴은 "ㄱ"자였다

진희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의 정보란에 들어가 보니 계좌 2개가 보였다


"엄마.. 이건 뭐고 이건 뭐야?"

"하나는 너희들 용돈 들어오고 아파트 관리비 나가는 통장이고

또 하나는 노령연금 들어오고 적금 빠져나가고

그런 통장이야"


통장 한 개는 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이 들어오고

엄마가 예전에 들어놓으셨는지 적금이 빠져나가는 듯 보였다


1~2년간의 지난 거래내역들을 살펴 보다 이상한 거래내역을 보게 되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이거 뭐야?

왜 진희한테 돈이 계속 빠져나가?"


6월 21일.. 그때가 아마 국민은행이 문을 닫을 시점이었다

그때 진희는 이미 할머니 핸드폰에 앱을 깔고

입출금 내역 조회와 계좌이체하는 방법을 알려드린듯했다

그래도 밥만 축내는 줄 알았더니 기특하게도

할머니에게 이런 것도 알려드리고 이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게 은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상한 거래내역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엄마.. 이거 뭐냐니까?

왜 진희한테 돈이 계속 빠져나가?"


엄마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어.. 그때 진희가 돈 넣고 빼는 거 알려준다고

자기 통장으로 넣고 다시 나한테 보내준다고 한 거야"


6월 21일 11건의 계좌이체

6월 22일 6건의 계좌이체

6월 24일 3건의 계좌이체

6월 25일 3건의 계좌이체


그중 1건은 5만 원을 이체했고

중간에 8만 원을 다시 할머니 계좌로 넣기도 하였다


얘기는 그러했다


할머니에게 계좌이체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기 위해 나흘간에 걸쳐 교육을 진행하였는데

1만 원을 자기 계좌로 이체하고

다시 1만 원을 할머니 계좌로 이체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으나


이 양아치가 총 27만 원을 자기 통장으로 이체하고 할머니 통장으론 8만 원만 보내준 것이었다


내.. 이.. 양아치를 그냥

몽둥이 어딨어 몽둥이..ㅋㅋㅋㅋㅋㅋ



할머니는 그 뒤로 통장정리를 할 수 없어

돈이 다 들어온 줄로만 알고 여태껏 사이좋게 지냈던 것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귀엽고 재밌다

그냥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양의 탈을 쓴 손녀와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의

계좌이체 수업..ㅎㅎ



조카가 있어 든든하다

할머니에겐 친구 같은 손녀다

우리가 볼 땐 보호자 같은 존재다


진희가 있어 얼마나 맘이 편한지 모른다


1년에 1/3은 할머니 댁에 가서 잠을 잔다

집보다 할머니 집이 더 편하단다


할아버지가 눈을 감으실 때도 진희를 찾았다

진희도 장사를 치르는 3일 내내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할머니를 막 대하는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나쁜 말 하면 지옥에 간다고 독설을 날리던 진희!

이젠 그런 할아버지는 옆에 안 계시지만

할머니 곁을 진희가 지키고 있다


나는 진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진희가 시집갈 땐 막내 외삼촌이 큰 선물을 해줄 것이다


진희는 우리 집에 첫째 손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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