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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Jan 12. 2023

비는 솜사탕을 녹인다

우산

우산 없이 갑자기 비가 내리면 학교 앞 오락실로 달려가는 게 일이었다. 게임에 정신 팔린 친구 놈의 발밑에 놓인 우산을 슬쩍 집어오기 위함이었다

우산이 흔치않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햇볕이 쨍하던 오전 날씨와는 다르게 먹구름이 밀려온다. 비가 내릴 모양이다. 학교가 파할 시간이 되면 교문 앞은 전쟁터가 따로 없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문방구 처마끝으로 몸을 피한 병아리 파는 아저씨도 일주일에 한 번씩 나타나는 솜사탕 아저씨도 일단은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잠바 소매 춤 반쯤 내린 토시에 묻은 물방울을 튕겨내며 아저씨가 중얼거린다

"오늘 장사는 공쳤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따라 흐르는 꼬마를 쳐다보며 솜사탕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넌 엄마 안 오시니?"

"네.. 울 엄마는 안 와요"


예고에 없던 비가 갑자기 내리는 날이면 교문 앞은 우산을 손에든 저학년 엄마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들.. 엄마를 외치며 뛰어오는 아이들...

그럴 때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왜 우리 엄마는 우산을 가지고 한 번도 학교에 안 오시지?..."


한 번은 성년이 되어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엄마는 왜 비 오는 날 한 번도 우산을 가지고 학교에 오지 않았어?"


엄마는 그냥 웃고 넘기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보수적인 집안에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동네 아줌마들과 교류가 없던 서른 갓 넘은 초보 엄마가 한적하게 우산 들고 아이 데리러 학교 앞에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홉 살짜리 꼬마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찾아온 엄마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친구들이 마냥 부럽게 보인 건 사실이었다




그 꼬마가 어느새 자라 중학생이 되었다

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하는 더 먼 곳으로 배정받았다

수업을 마칠 시간이 다가오지만 창문 밖 비는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실내화를 가방에 쑤셔 넣고 신주머니를 머리에 쓴 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한다

운동화 뒷굽을 따라 튀어 오른 흙탕물이 등 뒤를 따라 목덜미까지 그대로 느껴진다

얼마나 뛰었을까? 이내 뛰기를 포기하고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운이 좋으면 가끔 살이 부러져 버려진 우산을 만나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눈에 띠지 않는다


이런 날이면 국민학교 때 엄마가 학교 앞에 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게 후회된다

그때도 남들보다야 집이 멀긴 했지만 지금의 중학교와 집까지의 거리는 국민학교 때와 비교하면 50배는 더 되는 거리였다

물젖은 운동화에선 걸을 때마다 꾹꾹 소리를 내며 발등을 따라 물이 올라온다

"에이~글렀다.. 오늘은 버스 타기 글렀다"

젖은 회수권을 내밀면 운전수 아저씨에게 한 소릴 들을게 뻔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차림으로 남의 시선을 받기도 싫다

이런 날이면 으래 집까지 걸어가기로 일찌감치 맘을 굳힌다




그런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인 걸까? 손 닿는 곳에 우산이 있어야 맘이 편하다

차에도 우산이 4개나 실려져 있다

차를 사자마자 드릴로 트렁크를 뚫어 우산 거치대부터 달았다

급할 때 요긴하겠지? 하고 달았지만 지하주차장을 많이 이용하다 보니 급하게 우산 쓸 일도 별로 없다

비 오는 날 얼마나 공을 친다고 골프백 안에도 비싼 골프우산이 준비되어 있다

사무실에도.. 집 현관에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우산이 있어야 맘이 편하다


내리는 비를 반밖에 막아내지 못하는 살이 부러진 우산이 너무나 싫다.

우산살이 조금만 뒤틀리거나 고리가 끊어진 우산도 싫다.

남이 비 맞는 것도 싫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와이프와 결혼하기 전 처음 사준 선물도 우산이었다

와이프는 비가 그친 다음날 물기가 아직 덜 마른 우산을 그냥 대충 접어 우산 집에 쑤셔 넣는다

그럼 그 우산을 다시 꺼내 물기를 닦아내고 우산 날개를 하나하나 펼쳐 가지런히 만들고 조심조심 돌려 말아 우산 집에 쏙 하고 넣는다

나는 그런 와이프가 이해되지 않았고 와이프는 그깟 우산 꼭 그걸 다시 꺼내 접어야 하냐고 많이 다퉜다


지금도 변한건 없지만 달라진 건 우산 갖고 싸우지는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20년이 걸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드라마가 생각난다

우산은 단순히 내리는 비를 막아주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가는 연인들의 우산 쓴 뒷모습을 보면 둘 중 누가 더 그를 사랑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속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과 배려가 함께 존재한다


분명 하나의 우산을 둘이 썼지만 우산은 세자의 중심에 서있다

훗날 세자가 성인이 되었을 땐 저 우산의 중심은 중전을 향해있을 것이다


추억, 엄마, 그리움, 후회, 원망, 소유, 창피함, 자식, 배려, 부자, 가난... 사랑... 그림자...

나에게 '슈룹'은 단순한 비를 막아주는 우산..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이 부러진 우산을 써도 창피하지 않으면 뻔뻔한 아저씨가 되어가는 중이라는데 나도 나이를 먹나 보다

원망은 그리움으로 바뀌고 가난은 부자로 바뀌었다

50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많은 걸 바꾸어 놓은 듯하다...


내리는 비에 솜사탕이 녹는다

내 마음도 눈 녹듯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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