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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지 Dec 24. 2023

나이키 운동화 때문에 가슴을 치며 꺼이꺼이 통곡한 사연

짝꿍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영혼의 거울

지난 한 달 동안 미국, 한국, 일본 출장을 갔다 왔다. 와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느라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싱가폴에 있는 한국 친구들과 우리 집에서 연말 파티까지 계획해 둔 터라, 짝꿍은 나 대신 집 청소를 싹 다 하고, 냉동실에 친구들 한 명씩 올 때마다 주라며 크랜베리와 로즈마리를 얼려서 만든 특별한 웰컴 드링크를 만들어 두고, 한국식 쌀로 밥을 짓고, 잡채에, 떡꾹떡을 넣은 떡볶이 같은 닭갈비를 요리해 주고, 화장실에는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향초까지 켜 두고, 한국 친구들이랑 편하게 한국말로 이야기 하라며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길이었다. 파티 준비를 싹 다 해주고 나가는 남편을 보며, 친구들이랑 놀라고 신용카드 주고 나가는 남편 같다며 친구들은 어떻게 저런 남편을 만났냐고 했다. 하아.. 저렇게 만드는 데 어언 7년.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주겠다.

웰컴드링크와 남편이 준비해준 파티상

사실 짝꿍이 나가기 전, 아니 내가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줄곧. 우리는 서로에게 "아직" 터뜨리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른 것에 관대한 편이긴 하지만, 잠자는 시간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선 통제할 수 없는 예민함과 화를 가지고 있다. 이게 왜 그런가 약간 변명을 하자면, 워낙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내 부족한 머리를 120%로 돌려서 몰입을 하는 것들이다 보니,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두통이 생길 때 나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에 대한 짜증/두려움이 있다. 마치 핸드폰이 필요한데, 밧데리가 5% 간당간당 남은 느낌이 안 되도록 관리하는 느낌이랄까. 출장 중에도 매일 새벽 2-3시까지 일했고 갔다 와서도 그런 상태이다 보니, 짝꿍이 하는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국/유럽계 회사들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23일 이후 2주 동안 연말 크리스마스/새해 연휴를 가기 때문에, 그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짝꿍도 그런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니, 저렇게 다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을 다 해 둔 것이었는데.. 내가 사람들 오기 전에,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이키 리미티드 에디션 신발을 밖에 있는 신발장에 무심하게 넣어 둔 걸 보고 지나가는 말로 "아니 이렇게 비싼 신발을 밖에다 그렇게 두면 어떻게 해" 하고 말한 게 발단이었다.


남편의 나이키 사랑.. 문제의 그 나이키 모델

기분 나쁘지 않게 웃으면서 말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말을 들이니까 갑자기! 지난 2주 동안 한국 본가에 있는 동안, 아무리 바쁠지언정 포기할 수 없었던 남동생과 엄마와의 밤늦은 폭풍 수다가 떠올랐다. 그중 올해 남동생이 추석 연휴에 같이 일하는 사장 세 명이랑 싱가폴로 워크샵 왔을 때 겪었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에 대한 리뷰가 있었다. 참고로 남동생은 가게 설거지 알바로 시작해서 지금은 서울 여러 군데 가게를 키워온, 나보다 어리지만 사업적으로 훨씬 성공한, 나 같이 월급 받고 사는 직장인과는 차원이 다른 내공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산전수전공중전 겪은 사람의 입장임을 감안하고, 그 싱가폴 방문했을 때 내 짝꿍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리뷰랄까.. 더군다나 자기가 젤 좋아하는 큰누나이다 보니 그 당시엔 데리고 간 사장들도 있고 해서 굳이 표현하지 못했던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어떤 열변을 토했는지는, 에피소드를 들으시며 판단하시길.. (참고로 남동생은, 나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짝꿍 같은 사람이랑 결혼 잘했다고는 생각하고는 있다.)


그날은 남동생이 싱가폴 시내에 있던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센토사섬 호텔로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서, 짝꿍이랑 차를 타고 센토사에 먼저 체크인해주러 가는 길이었다. 사실 짝꿍은 여느 싱가폴 사람과 달리 집 앞에 슈퍼를 가더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패션 아이템으로 싹 다 치장을 하는 사람인데 (액세서리, 안경, 양말 색은 물론, 심지어 신발 끈 색깔까지 자기 옷 스타일에 맞춰서 바꾸는 사람..ㅠㅠ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게 행복하단다..), 그리고 그날은 특별히 자기가 아끼는 하얀색 티셔츠를 입었던 것 같다. (난 무슨 브랜든지는... 발음할 줄도 모르겠으나 사진 첨부) 그걸 입고, 나랑 드라이브하면서 아침에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니까, 커피까지 챙겨서 기분 좋게 가는 중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가는 중에 그 커피를 그 옷에 싹 다 쏟아버렸다는 것이다. 무슨 얘길 하다가 박장대소하며 웃다 그만 컵 뚜껑이 벗겨지면서 그 안에 있던 아메리카노가 모두 짝꿍이 입고 있던 새하얀 티셔츠로 날아가 안착해 버림.. ㅠㅠ ㅋㅋ 나는 그 티셔츠가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리미티드 에디션과 사이즈임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남편은 너무 화가 나는데 나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럼 내가 더 ㅈㄹ할 테니까) 겁나 정색을 하고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하아..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유튜브 검색을 하면서 하얀색 티셔츠에서 커피 자국 지우는 동영상을 폭풍 검색하고, 내가 어떻게든 지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일단은 갈아입을 옷을 호텔에서 만난 남동생한테 빌려 입히고, 호텔 화장실에서 초벌로 티셔츠를 조금 빨고 (그때도 상당히 지워진 상태) 집에 가서 레몬 사서 산성 세제 만들어서 지우면 될 거라고 했다. 그럼에도 짝꿍은 세탁을 해도 잔여 느낌이 날 수밖에 없다면서, 새로 사지 않는 이상 안된다고 그러길래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그 티셔츠를 한국 송파 매장에서 샀다고 함) 홍대에 있는 브랜드 매장 가서 혹시 같은 모델 사이즈 팔지 않는지 물어봤으나 그 같은 모델은 XL 사이즈 하나가 천안 지점에 있다는 답변이었다... ㅠㅠ 내가 한국에 있는 엄마까지 Activate 해서 매장을 가게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남동생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나이에 (나보다 6살 많음) 지금 그 천 쪼가리 하나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에너지를 쓰게 하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동생은 그 상황에서는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혼자 한국 갔을 때, 그렇게 열변을 토한 것이었다.

가만히 듣다가, 꿀이(내가 동생들을 부르는 애칭) 너가 말하는 거 다 너무 알겠는데, 야 참 결혼이라는 게, 그렇다. 하고 말았다.  

그 얘기를 하도 한참 듣고 싱가폴에 왔더니, 저렇게 나이키 신발 밖에 있는 신발장에 둔 것 하나에 연연하고, 집 나가기 전에 나는 5분 만에 준비하고 기다리는데(나는 지금 잠자는 시간도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분초를 다투며 일하고 있는데!!), 한가하게 나이키 핫핑크색 운동화 끈 색깔 바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베알이 꼬이는 것이었다. 부부는 정말이지 뭔가 보이지 않는 텔레파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생각인지 다 알게 되는 오묘한 관계이다. 짝꿍은 그걸 지켜보는 나의 뾰루퉁한 표정을 보고는 자기 너무 서운하다고 막 화를 냈다. 자기가 나의 연말 파티 준비는 물론이고, 나 피곤하니 먼저 자라고 하고, 자기가 새벽 3시까지 설거지며,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 좋으라고 집 정리도 싹 다 말끔하게 해 놨는데, 그건 알아주지 않고 자기가 신발끈 바꾸는 5분을 기다려주지 못하냐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지금은 커피자국이 말끔하게 지워진 하얀 티셔츠

아.. 나는 이때 우리의 관계에서 또 한 번 토네이도처럼 휩쓸고 갈 어려운 대화가 시작되겠구나.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의 내 에너지 상태에서는 너무나 버겁고 피하고 싶어서, 그냥 우리 각자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이번에 짝꿍은 안된다고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며 나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 앉혔다.


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세달전 커피 쏟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너가 어제 나이키 신발 내가 잠깐 거기 넣어 둔 것과 핫핑크 나이키 신발 끈을 바꾸는 5분이 왜 나의 신경을 크게 건드린 것인지 이야기했다. 더군다나 내 가족이 방문한 상황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서 것에 큰 실망감이 있었고 엄마랑 남동생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그랬다. 또, 내가 느끼기에 그런 너의 패션 아이템에 대한 집착이, 나와의 관계를 안 좋게 하는 것 같고 (나는 물건에 소유욕을 갖는 것에 알레르기 있는 사람인지라-내가 보통 사람 아님은 알고 있음) 너의 그런 행동들은 리미티드 아이템을 나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그랬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협상 결렬.. 짝꿍의 입장에선 지극히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다 다를 것이고,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템에 대해 우리의 관계까지 연결시켜 생각하는 건 비약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가 아끼는 물건이 훼손되었을 때 당연히 기분 나쁠 수 있는 건데, 너는 지금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맞는 말이었다.)


이 상황에서 보통은 각자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왜 내 입장을 알아주지 않느냐고.


그런데 나는..


갑자기 그때부터 가슴을 치며 꺼이꺼이 눈물 콧물 흘리면서, 미친년처럼 대성통곡을 한.. 10분 동안 끊이지 않고 했다. 차 안에서 대화하다가 갑자기 남편둥절.. 그게 이렇게 정신줄 놓고 울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내가 그칠 줄 모르고 꺼이꺼이 우니까 당황해서 잠깐 나가있겠다고 하고 내 울음이 조금 잦아들 때까지 차 밖에 나가있었다.


내가 울면서 "너" 때문에 우는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우는 거라고 했더니 짝꿍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랬다. 내가 그렇게 자지러지게 우는 모습 두 번째로 본다고.. (첫 번째 에피는 담에 소개)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든, 표면적인 감정이나 말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잠재의식을 들여다보는데, 특히 나에게 연인은 내 영혼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어떤 모습에 화가 나거나 할 때 나는 늘 나를 자연스럽게 나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어떤 갈등이든 결국은 모두, 내 내면의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예. 느려터진 상대방이 답답한 빠릿빠릿한 나는, 상대방한테 문제가 있다기보다 실은 내면에 느린 나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나는 저 앞에 남편과의 대화에서, 그 순간 알아차려 버렸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얼마나 생존을 위해 부족한 나 스스로를 경멸하고 몰아치며 살아왔는지.

외국에서 여자 홀몸으로 와서, 사람답게 살겠다고 여기까지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가족들은 물론, 그 누구한테, 단 한 번도 우는 소리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천 쪼가리 하나 가지고 우는 소리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한 번도 징징대지 않고 짊어왔던,

인생에서 아무도 나를 구해주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오롯이 나뿐임을 받아들이고,

여기까지 오는 그 여정에서 아무리 아프고 서러워도,

그 누구한테 단 한 번도 징징대지 않고 여기까지 온 내가,

나 사실은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비로소 흘릴 수 있는 나를 위로하는 통곡이자 눈물이었던 것이다.


이 나의 내면 이야기를 짝꿍이 이해할 수 있을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리고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짝꿍은 나한테 너처럼 똑똑하게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성찰하게 혼내는 여자는 처음 본다며..... 자기가 알아서 더 잘하겠다고 그랬다. 왜냐면 내가 자기를 탓하는 게 아니고, 너의 부족함을 품지 못하는 관대하지 못한 나 때문에 그렇게 대성통곡하는 방법...... 도대체 이걸 무슨 수로 이기냐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제탓이오 scolding (혼냄) 스킬 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줌.


이렇게 나에게 꼭 맞게 훈련이 되어가는 짝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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