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도모르게 상대가 내게 너무 큰 존재가 되어버려서 나를 압도해버리는 경험.
그녀라는 원 안에 푹 파묻혀 그의 생각과 행동, 좋아하는 것까지 이미 다 내 것이었던양 여기고 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던 그런 사랑.
서른을 훌쩍 넘어서 그런 사랑을 해버렸다. 무력하게. 조금의 발버둥도 치지 못하고.
누가 사랑은 사고처럼 오는 것이라고 했던가. 세상 이해할 수 없던 문장이 덤프트럭처럼 나를 치고 지나갔다.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도 모르는 듯, 조금의 속도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너에게는 아무일도 없었던듯이.
본디 연애란 두 존재가 하는 일이다. 독립적인 두 사람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가며 신뢰가 깊어지는 것이다. 나는 나와 연애할 수 없다. 동일하게 너는 너이고자 하는 존재와 연애할 수 없다. 그렇기에 너의 이별은 정당하다. 내가 좋아하는 너의 성격, 정확하고 명확했다.
그게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섹시한 남자가 되고 싶어졌다. 태생적인 어좁이를 벗어나고자 한 달정도 열심히 했더니 어깨가 2mm는 넓어진 느낌이다. 아무래도 현관문을 전보다 더 활짝 열고 다녀야한다. 이렇게 사는 기분이 꽤 괜찮다. 이 속도라면 3년 후엔 더블침대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덤벨을 든다. 어떤 단어들은 굉장히 상대적이다. 플랭크를 할 때 나의 60은 1분이 아니다. 그리고 스쿼트를 할 때 나의 재빠름은 성급함이다. 그래, 단어는 상대적이다. 어떤 일이 잘 되면 적절한 것이고, 잘 안되었다면 성급한 것이다. 감히 너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 나를 모른다. 네가 좋아했던 나의 모습을 내가 숨겼다. 너의 어리둥절함이 옳았다. 너는 나를 잘 못보았다. 그 원인 제공자가 나이기에 내가 미안해야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에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내가 아는 사랑은 그렇게 순간적이지 않다. 순간적인 충동은 보통 욕망에 쓰는 단어이다. 찬송가에서 사랑은 '오래참고'로 시작한다. 2000년대도 아니라 2000년 전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유효하다. 끝까지 가는 것, 그게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나 꽤 센스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지루한 글을 길게도 써내려간다지만,, 그 정도 쑥맥은 아니다. 내가 너를 꼬시지 않았더냐. 다만 내가 홀렸었다. 그 시간, 너에게, 홀딱..
헤어지고 나서 이런저런 회한과 개소리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치고, 해일과 지진이 나를 흔들 때, 유튜브를 끊었다. 그 좋아하던 뉴스와 인터넷을 멀리했다. 웹툰도 지웠다. 뭔가에 의존하고자함을 참을 수 없더라. 그래서 지웠다. 그랬더니 내가 명확해졌다. 아 나 이런 사람이었지. 오랜만에 나를 마주하였다. 내가 나를 보았다. 나란 사람. 나. 그래, 나.
회사 동료들에게 나는 무색무취의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나란 존재는 나름의 독특한 색을 지니고 있다. 회사사람들도 그럴거다. 다들 아침에 같은 모습으로 인사하고, 전화로 화를 내고, 요쿠르트 하나 빨면서 잠깐 웃다가 아무말없이 순식간에 점심식사를 한다. 겨우 눈뜨고 회의 몇 개 하다보면 하루가 넘어가고, 뭔가 미묘한 아쉬움도 미안함도 아닌 표정들을 지으며 서로 고생했다고 말하며 집에 가는 거다. 집에 가서 그 모든 것 잊고 넘길수 있다면, 그제서야 본인의 색을 다시 드러내겠지. 색이 잘 눈에 띄이지 않는다고 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삼성다니면 피가 파란색이라다만 실제 그러할리가 있겠는가. 다들 그런척 하는거지.
어렵게 이직을 했다. 회사라는 환경에 잘 적응하고 싶었다. 나의 색을 내가 지웠고 어쩌면 순간 잊었다. 내가 나의 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너를 만났다. 너의 색은 다채로웠지만 그 톤(Tone)이 나와 닮았다. 같은 톤의 색은 다르면서도 서로의 색을 더 돋보이게한다. 너로 인해 나의 색의 빛을 찾아갔고 우린 꽤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깊이의 헤르쯔가 맞았다. 나는 너만큼 너도 나만큼 깊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찾았었다.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나는 회사에서 잘하고 싶듯이 너에게도 잘하고 싶어져 내 색을 지워갔다. 어쩜 사회생활을 한 것이다. 연애같지 않았던게 당연한게지. 수 년간 나를 이렇게 훈련시킨 회사에 모든 저주를 퍼부으며 내 모든 실책을 거기에 넘긴다. 원래 직장인이란 만병의 근원이 회사다. 그리고 그 만악의 근원을 결국 뜨지 못하기 때문에 직장인이다.
아주 좋은 기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색을 가졌는지 다시 기억해보기 아주 좋은 시간이다.
쓰다말다한 내 일기장들 중 하나를 골랐다.
2008년. 아주 짠내나는 일기장이 있다. 정말 말그대로 쩔었다. 크지도 않은 투박한 수첩에 다번진 잉크들.
그래 이게 내 모습이지.
나는 항상 소개팅가면 이렇게 주장하곤 했다. 처음 가본 여행의 모습이 평생 간다고.
대학생 때 통장에 들은 200만원으로 길게 갈 수 있는 곳은 인도밖에 없었다.
뒤에는 배낭, 앞에는 보조가방과 카메라를 메고 두 달간 쪼리 한 켤레 뿐이었다. 코로나 덕에 위생관념이 철저해졌는지 지금은 떠올리기만해도 몸서리가 쳐지지만, 인도는 옷에 먼지따위를 걱정하는 곳이 아니다.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감상만으로 가득찬 서문이 있을까 한다.
너에게 바치는 글(?), 그런거 아니다. 말했듯 이건 나를 위한 글이다.
나에게 인도 여행이 그러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 그리고 참 많은 인연들이 있었다.
그걸 의미있게 기억하고 싶어 일기장을 만들었고, 시간을 들여 노트를 채웠다.
그 이야기를 새로운 공간에 옮겨보려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말을 걸어보고자 한다.
"삼십 대의 내가 이십 대의 나를 만나다."
영화 스파이더맨에 달린 댓글에서 나처럼 묘한 감상을 느꼈다면 당신은 이미 살짝 나이를 먹었다.
나의 30대는 굉장히 멋있을 줄 알았다. 돈도 있을거고 차도 있을거고 그럼 간지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돈은 벌고 차는 있지만 뱃살과 머리 빠짐을 고민하게 될줄은 미쳐몰랐다.
지금은 지금의 결핍과 즐거움이 있듯이 그땐 또 그때의 결핍과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다름은 재미있는 법이고, 소통은 따라서 유익하다.
나의 일기장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시작해보려고 한다.
나의 인도여행 일기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참을 수 없는 우연과
예상치 못한 필연으로 이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