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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 Oct 22. 2023

톡 쏘는 사이다맛

탄산이 없으면 사이다가 아니다

은행나무길을 걸어가자고 조르는 둘째 때문에 걸어서 교회에 왔다.

참새처럼 종알종알 떠드는 둘째와 노란 장판이 깔린 듯한 은행나무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 애 바로 뒤에서 자전거를 멈추면서 내렸다.

"아, 왜 이 길로 걸어가!!"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이에게 다치지 않았냐는 안위를 묻기는커녕,
자전거길을 사람이 걸어가니까 자기가 와서 부딪힐 뻔했다면서 마구 짜증을 내고 우리 아이 탓을 했다.
째려보고 욕을 하듯 계속 뭐라 중얼거리면서 툴툴거리며 가는 가는 뒷모습에다
"사람이 우선이잖아요!"라고 소리를 쳤다.

"아, 넓은 옆 길 놔두고 왜 자전거길을 가!?"

"뒤에서 우리를 보고 오셨으면 아주머니가 좀 피해서 가 주셨어야죠! 사람이 안 다치도록요!"
그 아주머니는 더 이상 대꾸도 못하고 다시 한번 째려보고 갈 길을 서둘러 가버렸다.

사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느라 은행나무잎에 뒤덮인 길을 걸으며 인도인지 차도인지 분간을 못하고 낭만적으로 걸어온 내 잘못이 더 컸다. 아이가 자전거에 치일 뻔했다는 사실에만 집중을 해 그만 나도 아주머니에게 벌컥 같이 화를 내고 만 것이다.

아주머니는 멀리 있어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불쾌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가고 있는 게 다 보였다.

오늘은 주일이다.
거룩한 주일 예배드리러 가는 도중이었는데 내 잘못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나 역시 기분이 몹시 나빴다.

종종
부당하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대해 즉각 시시비비를 가리고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게 옳은 건지
아니면 내 잘못이 아니라도 먼저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게 옳은 건지 신앙인으로 살면서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심지어 이게 나의 잘못인지 아닌지도 분간 못하는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뻔뻔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예배시간에 목사님께서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를 고백하자 하셨을 때,
'하나님, 아까 제 행동은 죄인가요. 아닌가요? 그 아줌마 행동에 화가 나서 한마디 한 것은 옳은 일일까요
아닐까요.. 혹시 제 잘못이 더 큰 건 아닌가요?'라며 중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제대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예배 시간에 생각에 잠겨 버렸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침 목사님은 '포도나무'와 '열매'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때는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 '가을'인데, 넓은 산과 들에도 내 인생에도 아무런 결실도 '열매'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지.. 잎사귀만 무성해 그 속을 파헤치고 들여다봐도 새끼손가락만 한 열매가 풋내만 폴폴 내뿜으며 볼품없이 숨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찍어서 던지신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거 아닐까.


아, 순간 분별없이 욱하고 화를 냈던 나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예배가 아니라 자아비판을 하고 있었지만, 깨달은 건 있었던 거다.


"하나님! 그래도요.. 김 빠진 사이다보다는, 톡 쏘는 사이다가 더 '청량감'이 있는 거잖아요. 탄산이 없으면 사이다인가요..?" 볼멘소리로 억지 쓰며 우겨보는 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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