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소공녀> -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언니! 언니! 저는 그 영화 N차 뛸 거예요!”
영화 <소공녀>는 평창 동계 올림픽 자원봉사를 할 때, 새롭게 알게 된 룸메이트 동생이 강력히 추천해온 영화였다. 그 동생은 영화제에서 먼저 보고, 개봉하면 N차 관람(같은 영화나 공연을 N차로, 여러 번 관람하는 것을 의미한다.)을 할 영화라고 칭찬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진짜 정말 보고 싶었고, 또 그 친구가 말해준 영화의 한 줄 줄거리도 매력적이었기에 개봉하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다만, 시간에 맞는 상영관을 찾지 못해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마주한 영화 <소공녀>는 충분히 N차 관람을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두 시간 가량 펼쳐지는 미소의 서울 여행기를 다 보고 나면 핑, 눈물이 맺히게 되는 신기한 영화다.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에서 시작된다. 지극히 현실적이지 않은 그런 생각.
2015년, 담배 값이 오르고, 월세도 오르자, 서울의 하루살이 미소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술, 담배를 포기하지 않고, 집을 포기한다. 무려 ‘집’을...! 넓은 집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머물 수 있는 곳을 포기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 그런 무모한 용기, 그것이 ‘미소’라는 캐릭터의 힘이자 첫 번째 매력이다. 영화는 그런 무모한 선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어쩌면, 관객인 우리들이 가장 원하는 선택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무모한 용기처럼 보이지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미소는 그 결정을 내릴 때, 극심한 고민에 빠지지 않는다. 왜? 그녀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의 주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집을 포기한 그녀는 과거 같이 밴드를 했던 과거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어쩌면 하룻밤, 조금 여유가 된다면 여러 날을 재워줄 수 있겠냐는 그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는 민폐인 부탁이겠다. 첫 번째 친구 문영은 회사를 다니고 있고, 점심시간에는 밥이 아니라 포도당을 맞는다. 미소가 담배 이야기를 하자 화들짝 놀라 끊었다고 황급히 말하는 그녀는 미소의 부탁을 거절한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맞다. 미소의 부탁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부탁이겠다.
두 번째 친구 현정은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미소를 반갑게 맞이한다. (앞으로 만날 친구들 중에서 가장 기쁘게 미소를 맞이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미소로 인해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현정은 괜찮다며 말해준다. 현정은 사실 그렇게 행복함에 가득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다. 부부싸움도, 홀로 다 해야 하는 집안일도, 과거 키보드를 잘 쳤던 현정은 찾아볼 수 없다. 피곤함 탓에 살짝 머리만 붙여도 잠에 드는 현정의 모습을 보며 미소는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음식을 못해서 스트레스받던 현정을 위해, 반찬을 잔뜩 만들어놓고 미소는 간직해오던 과거 밴드 사진 뒤에 ‘니 밥 좀 챙기고 살아라.’라는 짧은 글을 남기고 떠난다. 가장 자신을 반갑게 맞이 해준 친구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세 번째 친구 대용은 이혼 위기의 남자다. 결혼 8개월 만에 그는 자신이 꿈꿨던 가정이 파탄 났고, 매일 술과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이혼의 이유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아파한다. 그는 집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며 한탄한다. 이 집이 진짜 본인의 집이 되려면 20년 동안 매월 100만원을 내야 하는데, 20년 후면 이 집이 낡아 있을 것이라 말이다. 미소는 그런 대용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아침밥을 차려준다. 남자친구 한솔이 남자와 단둘이 지내는 것에 반대하자 미소는 대용의 집에서 나오게 된다.
네 번째 친구 록이는 미소보다 나이가 많은 미혼의 남자다. 부모는 록이를 결혼시키고 싶어 하고 그래서 미소가 반갑다. 그래서 록이는 가볍게, 또 쉽게 자기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미소에게 한다. ‘너 갈 데 없다며’, 미소는 분명히 자신의 뜻을 전한다.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다음 날, 미소는 록이의 집에서 자신이 갇힌 것을 알고 무서워하며 작은 쪽문으로 도망친다. ‘친절히 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쪽지를 남기고 말이다.
마지막 친구 정미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편한 환경에서 미소는 점차 여유를 찾아가고 돈을 모으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이는 미소가 정미의 과거(밴드에서 기타를 쳤던 일)를 정미의 남편에게 말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길 것의 복선이 된다. 미소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할까 불안해진 정미가 미소에게 나가라고 한다. 염치없다며. 월세가 부족하면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며, 술과 담배에 대한 너의 염치없는 사랑이라고. 정미는 자신의 말이 폭력적이었다면 미안하다며 100만원을 건넨다. 미소는 사과하고 100만원은 두고 정미의 집을 나오게 된다.
이 다섯 친구를 만나는 내내 미소는 현실 속 변한 친구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과거, 자신이 행복하다고 정의 내린 순간들과 달라진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는 슬퍼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변했다고 생각한다. 미소의 집은 과거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그럼에도 미소는 그걸 생색내지 않는다. 행복했으니까. 미소는 자신의 집이 좁았어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으니까. 다섯 친구들에게 미소가 부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과거가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소는 다섯 친구들에게 행복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자, 자신들이 잊은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미소의 등장이 기쁘기도,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미소는 꿋꿋이 그것들을 간직해나갈 것이다. 행복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행복이 가득하다. 미소가 안정적인 삶을 사는 세 가지 요소, 위스키 한 잔,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 그런 한솔은 자신과 미소가 행복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소와 다른 현실적인 사람이다. 미소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2년 동안 파견 지원을 하는 그다. 미소는 그런 그에게 화를 낸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큰 게 아님에도 그렇게 통보하는 그가 미워서, 또 동시에 한솔은 말한다. 자기가 지원한 것 중에서 유일하게 합격한 거라고. 한솔은 간절히 말한다. 상상하자. 곁에 있는 거라고.
참 모두가 아픈 세상이다. 모두가 참 많이 아픈 세상이다. 그래서 서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나를, 내 모습만 보게 되는 세상이다.
미소의 여정 내내 아무도 찾아온 미소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고, 미소는 내내 들었다. 집은 없었어도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집은 지키지 못했어도 자기 자신을 지킨 미소의 이야기가 참 부럽다.
집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한 형식이다. 흔히 초등학교 때부터 삶의 기준으로 배우지 않나, ‘의식주’. 근데, 실제로도 의식주만으로 살 수 있나? 정말 생존에만 기초한 조건이다. 의식주에는 '내'가 없다. 내가 없어도 괜찮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행복을 주는 것을 포기하고, 의식주를, 집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노력하는 시간 동안 내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을 잊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 집이 정말 내 것이 되려면, 20년 대출금을 다 갚아야 한다는데, 내 것이 되면 다 낡았을 텐데….
참 용기가 없는 요즘,
미소의 모습에는 용기, 그 이상의 확신이 있어 보인다.
우리는 상처도 늘고, 현실을 자각하고, 물가가 오르는 사회에 적응했다.
미소는 자신의 사회를 지키려고 오늘도 서울의 하루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낸다.
그녀의 여행이 참 무모하면서도 부럽다.
+)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미소의 과거 친구들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집에 도착해서야 담배를 피우는 문영, 모두가 잠든 밤에 키보드 앞에 앉아 보는 현정, 매일 밤 술을 마셔야 잠을 잘 수 있는 대용, 술을 마시는 어머니에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는 록이, 홀로 미소가 남기고 간 사진들을 보는 정미까지.
그들은 변했지만 그건 절대 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
.
.
그리고 민지 씨.
+)
행복,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최근 있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 자원봉사를 하면서였다. 자원봉사를 하던 3주의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고 자부한다. 매일 오랜 시간 봉사 위치에서 서 있고, 숙소는 온수 제한 시간이 있었고, 첫날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찬바람이 부는 방에서 잠을 잤다. 첫날에 가장 후회했다. 괜히 신청한 것은 아니었나 싶었다. 그렇게 며칠, 새로 알게 된 룸메이트들은 모이면 하나같이 말했다. “왜 이렇게 행복하지?”, “왜 행복할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다니 놀랍다. 같이 하던 사람들과 합이 잘 맞았고, 또 종종 강릉 여행을 할 수 있었고, 매일 근무시간이 끝나면 올림픽 파크에 가서 핀(올림픽에는 핀 트레이딩이라는 문화가 존재한다.)을 모았기 때문일까? 사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직전 학기 학교에서 ‘행복의 과학’이라는 수업을 들었음에도 사실 정확히 그때 왜 그렇게 벅찬 행복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사소한 것에 만족할 줄 알았고, 내일 할 일을 고민하지 않는 밤을 보냈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가 어렵지 않았고,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축제에 힘을 보탰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가 흔히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돈, 의식주가 풍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 기억나는 대사
1. 봄에 하자.
2.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3. 밥은 먹었어요?
4. 아픈 사람이 많구나.
5. 난 민지 씨가 좋아하는 일 하니까 기뻐요.
6. 매달 100만원씩 20년을 내면 이 집이 내 꺼가 된다? 그때 되면 집이 되게 낡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