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고난+고난

앞이 보이지 않는...

by 이보연

입원생활 중에는 의레 잠을 설치게 되지만 유난히 늦은 시간까지 잠이 안 오던 어느 날 새벽. 깜빡 잠이 들었다가

"코드레드, 코드레드.(소아 코드블루) 146 병동 혈액종양내과. 소아."

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깼다. 우리가 있는 방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처치실의 분주한 소리와 엄마의 울음소리. 반쯤 정신이 나가 보이는 엄마와 아빠.


소아암 병동.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병원을 옮긴 후 사람을 몇 사귀어 보았지만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친해진 대부분의 아이들을 잃었다. 우리의 상황상 평범한 아이들과 친해지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어서 병원에 오면 더더욱 사람을 피하곤 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car-t치료를 한 아이가 입원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그 엄마를 찾아갔다. 아주 자세한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아무 치료도 듣지 않던 아이의 몸에 어떤 암세포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같은 치료를 받은 아이들 모두 잘 되었고 중국 아이들도 거의 다 잘되더라고 힘을 실어준다. 같은 길을 앞서 간 사람에게 희망적인 얘기를 들으니 너무나 힘이 나고 든든해졌다.

아이가 치료를 시작했던 6년 전만 해도 생각도 못했던 획기적인 치료법이 생겨나는 동안 잘 버텨주어 다행이고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불응성으로 속절없이 떠난 친구들이 떠올라 이내 슬퍼졌다.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방법, 우리나라에서 기다리는 방법. 모두 순탄치 않겠지만 지금까지처럼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아이 손을 잡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른되어도 독립 안 하고 엄마 아빠랑 같이 살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하는 아직 어린 내 새끼. 꼭 어른이 되어 엄마 아빠랑 살아달라고 속으로 애원하고 애원했다.


이식 후 망가진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시작한 항암치료는 예상대로 힘들었다. 한창때에 비하면 1/50밖에 안 되는 양을 썼을 뿐인데도 입안이 다 뒤집어지면서 토하고 못 먹고 열이 오르내렸다. 절뚝거리고 걷는 것마저 힘들어하며 눈이 풀려 멍하니 앉아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맘이 너무 힘들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었다. 내가 이 녀석을 죽이고 있는 건가 살리고 있는 건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정말 힘들 때도 울지 않던 아이인데 자주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 한순간 나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엄마는 아이에게 힘을 줘야 하는데 아이의 슬픈 눈을 보고 있자면 그냥 같이 울고 싶어졌다.

"위인전 많이 읽어봤지? 그중에 평범하고 평탄하게 자란 사람 있었어? 훌륭한 사람은 원래 고난이 많은 거래~ 넌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이렇게 힘든 일을 겪는 걸까? 지금은 힘들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얘기하니 금세 눈물을 훔치며

"엄마, 나는 아플 때마다 엄마가 내 엄마여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5년 넘게 아픈데 이렇게 해주는 엄마가 어딨어요?"

하며 예쁜 소리를 했다.


기다림은 3개월째 계속되었다. 그 사이 중국 길은 완전히 통제되었고 아이는 쭉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척수 검사 중 다시 이상세포가 발견되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교수님의 전화를 받고부터 중국행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다. 비자며 격리, 비행기, 필요한 물품들... 마스크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신랑은 하루 종일 여행사와 영사관, 국내와 중국 거의 모든 항공사에 전화를 하고 식약처며 제약회사며 닥치는 대로 전화를 돌리는 듯했지만 코로나19를 뚫고 나갈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 다음날 외래진료 때 구체적인 상의를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차트를 보더니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교수님. 미리 해두었던 폐기능 검사와 폐 ct를 봤을 때 '폐숙주'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식 후 타인의 조혈모세포가 자리 잡으며 원래 있던 장기들을 공격하는 것을 숙주반응이라고 하는데 가벼운 숙주반응은 나쁘지 않지만 폐나 신장은 한번 망가지면 회복이 어렵기 때문에 예후가 안 좋은 축에 속했다. 더군다나 숙주반응이 있는 상태에서는 car-t치료는 물론 재이식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숙주 치료하고 가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폐숙주가 이렇게 뒤늦게 나타난 경우 치료가 된다고 해도 2~3년은 걸린다고 했다. 그사이 계속 척수항암만 하며 버틸 수도 없는 일이고 숙주 치료와 항암치료를 병행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어서 결국엔 어느 쪽에서든 문제가 생길 거라며 최악의 경우까지 입밖에 내시고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다. 간접적으로 많은 아이들의 끝을 경험한 나였지만 그게 우리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은 사실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는데 교수님 입을 통해 듣는 순간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온갖 멘탈과 마음과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오열하고 싶은 와중에 아이가 밖에 있어서 겨우겨우 참으며 한 시간을 울었나 보다. 주차장에 내려와 차 안에서 셋이 울었다. 억울하고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아까 교수님 말이 현실이 되어 펼쳐지니 아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은찬아, 숙주 치료를 먼저 해야 해서 car-t는 지금 못하고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아."

말하니 그 와중에 이 녀석... 딱 5분쯤 울고는 금세 툭툭 털어냈다. 기특하다 못해 항상 미안하고 감사한 녀석...


뾰족한 방법이 없기에 위험하지만 숙주 치료와 항암치료를 같이 시작해 보기로 했다. 아주 적은 용량의 스테로이드를 쓰기 시작했는데 신기할 만큼 빠른 속도로 호전되었고 그 틈을 타 은찬이도 폐기능을 늘리겠다며 악착같이 운동을 했다.항암 반응 역시 좋아 암세포도 다시 사라졌다.


약물의 반응은 좋지만 스테로이드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부작용이 반드시 따른다. 다시금 근육이 다 빠져 걷지 못하게 되었지만 약을 끊으면 다시 좋아지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괜찮았다. 집에서도 휠체어를 타야 할 만큼 다리에 힘이 없어졌지만 아이는 좌절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용히 휠체어를 밀고 나가 공부를 했다. 저녁식사후면

"보드게임해요~!"

하고 졸라 한두 시간씩 깔깔대며 게임을 하고 때때로 노래방 마이크로 록을 멋들어지게 부르니 온 가족 우울해질 틈이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항암치료와 숙주 치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길 때쯤 혹시 몰라 해본 검사에서 심각한 골다공증이 발견되었다. 70~80대 노인들 보다도 심각한 정도라고 했다. 척추뼈 여러 개가 스스로 무너져 압박골절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해결해가도 모자랄 판에 병명은 오히려 더 쌓여가고 있었다. 주 병인 '백혈병'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천천히 해결하면 될 일인데 치료방법이 있음에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미치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루하루를 평온하고 알차게 살아가고 있는 은찬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이를 1년 넘게 맡아봐 주었던, 아이의 고비고비를 모두 알고 계시던 교수님이 안식년에 들어가게 되었다. 병원 밖에서도 모니터링해 줄거라 하셨지만, 병명이 너무나 많이 쌓여 언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아이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병원에 없다는 것은 굉장한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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