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새로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둘째는 오빠와 유전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피검사를 해야 했다. 유난히도 겁이 많아 예방주사를 맞을 때조차 애를 먹이던 둘째였지만 자기가 오빠를 살릴 열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팔을 내밀었다.
조혈모이식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이 100프로 유전자가 맞는 형제에게 이식을 받는 것이었다. 형제간 유전자가 같을 확률이 25프로이니 그리 높은 확률이 아니었고 두 녀석 평소에 달라도 너무 달라 100프로 맞을 거라는 기대는 사실 크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인 나와 더 맞을 것 같다는 무식한 주장도 해댔더랬다.
역시나 둘의 유전자는 반밖에 맞지 않았다. 다시 타인 공여자 중 유전자가 맞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야 했다. 유전자가 일치하는 공여자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아이는 다행히도 맞는 사람이 49명이나 되었다. 공여자가 많으면 그중 젊고 건강한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나머지 검사를 하게 되는데 운이 좋게도 첫 번째 검사했던 30대 젊은 남자분이 이식을 해주기로 하셨다. 고난의 와중에도 막히려면 끝도 없이 막힐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사이 아이도 나도 새로운 병원생활에 많이 적응을 했다. 상황이 비슷한 형아를 사귀어 함께 프라모델을 만드는 취미생활을 했고, 아가 동생들을 지켜보며 귀엽다고 미소 짓기도 했다. 사람이 없는 밤 시간이면 폴대를 밀고 병원 지하에 내려가 책이며 간식 쇼핑을 해서 1층 야외벤치에 나와 바람을 쐬며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오랜 시간 기다려 창가 자리를 쟁취한 날이면, 블라인드만 올리면 올림픽대교인 병원 창밖을 내다보며 한강 전망인 병원에 다니는 것도 호사라며 웃었다.
소아과 병동... 그중에서도 암병동이다 보니 선생님들 대부분 친절하고 좋았다. 희수가 방 선생님들 몇 분에게 열쇠고리 만들어 선물했더니 마침 월급날이라며 책이며, 다이어리며, 젤리로 돌아왔다. 병실을 옮겨도 몰래 찾아와서 한참 수다 떨고 가는 친한 선생님도 생겼고 밥까지 떠먹여 주는 펠로우 선생님은 왕년에 방배동 민선생님으로 날렸다며 여차하면 공부까지 봐줄 기세로 아이를 챙겨주셨다. 도도해 보이는 담당교수님조차 "우리 희수~ 우리 희수" 하며 아이를 아끼셨다. 오로지 치료받으러... 그것만 보고 온 병원에서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아이는 맘이 조금씩 또 열리고 있었다. 희수는 이곳에서도 사랑받는 아이였다.
이식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4개월 동안 하는 항암은 중환자실에서 나온 이후로도 자비 없이 셌다. 37일 만에야 집에 갈 수는 있었지만 거의 초주검 상태여서 집에 있는 내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온몸을 아파했고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는데 큰 병원은 한번 퇴원을 하면 다시 입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외래진료를 받고 수액만 맞고 집에 가기를 반복했다. 하다 하다 안되어 사정을 말하고 원래 다니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꿈이 바뀌었어요. 좋은 일 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사요.
어떤 방송에서 봤는데 외국에 나가서 아픈 사람들 치료해주는 의사도 있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덜덜 떨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목이 메었다.
'너란 녀석이 건강했더라면... 얼마나 멋지게 살아가고 있을까...
꼭 나아서 그 훌륭한 사람 되자!'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조금씩 흘러 이식받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항암치료를 모두 마치고 이식 전 검사에 들어갔다. 오랜 치료를 받아 온 아이다 보니 첫 이식임에도 이미 몸에 문제가 많았다. 히크만(중심정맥관)을 오래 가지고 있다 보니 건드려진 부분 때문에 심장에 혈전이 있어 지켜봐야 했고, 오랜 항암으로 간도 온전치 않았다. 면역력이 심하게 저하되면 발현된다는 거대세포 바이러스(cmv)는 이제 그냥 쭉 함께 하고 있었고, 면역력이 더 안 좋아질 때면 장염을 유발하는 균이 불쑥 튀어나와 격리를 당하곤 했다. 한참 성장하는 아이다 보니 빼야 할 이도 많아 이식 전에 멀쩡한 이를 네 개나 생으로 뽑아야 했다.
2019년 7월 1일.
말로만 듣던 이식방에 드디어 입성하게 된 그날의 느낌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식으로 잘못될 확률도 꽤나 높았기에 나는 애써 불안함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그저 홀가분해했다. 어쩌면 들떠있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예전에 눈썰매 탈 때 진짜 재밌었는데... 거기 또 가요~ 썰매 끌고 올라가는 건 힘들었지만 눈썰매도 재미있고 내려와서 먹은 핫도그도 맛있었어요. 나 그때 살 쏙 빠져서 그 사진 보면 난지 모르겠을 정도로 잘생겼는데... 우리 서울랜드도 가요. 이식 전에 가기로 했었는데 택도 없네요. 다 끝나고 꼭 가요. 하이원도 가야 하는데... 우리 이번에는 완치되는 거지요? 이번에 완치되면 몇 년 만이지.. 5년 만에 끝나는 거네요~ 아~~~"
하다가 늦게야 잠이 드는 아이를 보니
'저 정도 의지면 살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음날부터 드디어 '이식전처치'가 시작되었다. 전처치라는 것이 이식을 받기 위해 온 몸속의 자기 세포를 다 죽인 후 새로운 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보니 모든 수치가 0이 될 만큼 힘든 상태가 된다. 아이의 경우 재발이다 보니 그중에서도 최대한 세게 진행해야 한다고 해서 시작부터 걱정이었다.
전신 방사선 치료를 하루에 두 번씩 4일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전처치는 첫날부터 힘들었다. 첫날밤 턱이 너무 아프다며 얼굴을 잡고 뒹굴었다. 통증이 없어지지 않으면 치료를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새벽녘에야 통증이 잡혀 치료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나면 악명 높은 '토끼 혈청'의 차례였다. 실제로 토끼의 혈청을 주입하는 것이고 이때 열이 안나는 경우는 열에 하나 정도라고 했는데 아이는 그 하나에 속했다. 시작이 순조로운 건 좋은 징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전처치를 무사히 마치고 7월 9일 아이는 드디어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다. 힘들어서 누워서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아이는 너무나 씩씩하게 앉아서 평소와 다름없이 화상영어 수업을 하며 방금 받아온 따끈따끈한 공여자의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았다.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의 아픔은 모두 잊고 건강한 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온 가족 손 모아 기도했다.
역시 이식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이식받은 조혈모세포가 생착되려고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열이 지속되었다. 특히 입안이 흰색이 될 만큼 다 헐고 목을 너무나 아파했는데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쓰면서 수면제까지 맞아야 겨우 고통을 잊고 잠시 잠들 수 있었다. 구토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피와 위액이 고스란히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이럴 바에는 먹지 않고 영양제로 버티는 편이 나은 거라고 했다. 이식방은 그런 곳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티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힘겹게 버텨낸 아이는 열흘 후 엄마 생일에 맞춰 생일 선물로 예쁘게 수치를 올려주었다. 새로운 조혈모세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생착이 되기 무섭게 아이의 컨디션도 좋아졌고 컨디션이 좋아지기 무섭게 그간 못한 공부들을 하기 시작했다. 죽다 살아나 놓고서 구몬 조금 밀렸다고 동동대는 모습이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생착이 잘 되었음에도 다시 발현된 바이러스와 이식 후 숙주반응을 조절하느라 한참을 더 입원해 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이미 신청해 놓았던 개명신청이 통과되어서 병실에서 아이와 함께 이름을 골랐다. 작명소에서 받아온 몇 가지 이름 중 '은찬'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물소리 은, 맑을 찬'.
바이올린을 하는 아이와 어울리기도 했고, 다시 태어나는데 걸맞게 당찬 느낌의 이름인 것 같아 아이와 함께 최종 결정하고는 신청서를 완성했다. 이식을 위해 입원한 지 35일째 되어 퇴원을 하는 길...
'희수'로 입원했던 아이는 '은찬이'가 되어 퇴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