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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un 10. 2020

행인도 돌연한 출발을 했을까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 루쉰의 <행인>



나는 말을 마구간에서 끌어내 오도록 명했다. 하인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몸소 마구간으로 들어가 안장을 얹고 올라탔다. 멀리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 나는 하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문에서 그가 나를 멈추어 세우고는 물었다.

"주인 나리, 말을 타고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네."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적지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는가. '여기에서 떠나는 것, ' 그것이 나의 목적지일세."
"나리께서는 어떤 예비 양식도 갖고 있지 않으신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따위 것은 필요 없다네." 내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긴 터라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네. 예비 양식도 날 구할 수는 없을 걸세.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걸세."


- 카프카, <돌연한 출발>


루쉰의 <행인>은 세 사람이 나오는 시극 형태의 글이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  그리고 30대 행인. 거지의 모습으로 길을 가던 행인이 노인과 소녀에게 물을 구한다. 행인은 자신의 이름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계속해서 가야 한다고만 말한다. 노인이 권하는 휴식과 소녀의 보살핌도 마다한 채.


그가 가고 있는 쪽에는 무덤이 있을 뿐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무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가야만 한다고, 자신이 아는 것은 먼 길을 왔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행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쉴 수가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노인도 들었다는 소리. 그러나 노인이 상대를 하지 않으니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행인은 더욱 쉴 수 없다면서 다시 길을 떠난다.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에는 떠나려는 '나'와 하인이 나온다. 하인은 <행인>에서의 노인과 소녀처럼 그에게 그냥 여기 머물기를 바라면서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제대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나'는 떠나려고 할 때 트럼펫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떠나는 것'을 위해 길을 떠난다. 하인이 말한  예비 양식도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 필경 굶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여기를 떠나는 것만이 목적이다.


'행인'은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걷고 있었다. 소리를 듣고 출발을 했건 걷고 있을 때 소리를 들었건 여기를 떠나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돌연한 출발>의 '나'와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길을 찾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마음속의 소리가 일치한다면  앞에는 무덤이 있으며 굶어 죽을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갈 수 있다. 그 너머에 가보지 않고는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은 실로 엄청난 여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루쉰은 이를 절망 앞에 반항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절망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희망으로 인해 전투를 벌이는 사람보다 훨씬 용감하고 비장하다고 본다.'라고 했다.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을 읽으며 '여기를 떠나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념이 내내 맴돌았는데 루쉰의 <행인>을 읽으며 '나'가 돌연한 출발을 한 것은 '행인'처럼 '절망에 반항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가만히 앉아 막연한 희망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갈 곳이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고 앞으로 나가는 것만이 '나'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으로 인한 돌연한 출발이었다고.









끊임없이 여기를 떠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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