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우리 가족은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온돌 아궁이에 연탄 갈아 넣던 할머니 댁 문간방에 살다가 연탄보일러가 있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싱크대 달린 주방이 있었지만, 가스레인지가 없어 보일러실에 석유곤로를 놓고 밥을 했다. 연탄보일러 뚜껑을 열어 놓고 연탄 위에 뭔가를 굽기도 했다. 엄마는 밥을 할 때면 주방과 보일러실을 바쁘게 오갔고 우리는 좀처럼 보일러실에 들어갈 일이 없었다. 엄마가 안 계실 때 말고는.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 나와 동생은 달고나를 해 먹기로 했다. 골목 어귀에서 파는 달고나를 집에서 해 먹고 싶었다. 지금은 그런 게 왜 있을까 싶은 소다도 엄마의 부엌에는 있었다. 좁은 보일러실에 들어가 연탄구멍의 뚜껑을 열고 설탕을 넣은 국자를 올렸다. 설탕은 너무 빨리 녹았고 소다를 넣으려다 옆으로 다 흘렸을 것이다. 우리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어긋났고 국자는 새까맣게 타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의 꾸중은 내 몫이었다. 누가 도모했건 무슨 상관이랴.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을 부추긴 건 나였을 테니. 여전히 새까맣게 탄 자국이 남은 국자를 엄마 부엌에서 볼 때면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이런 걸 아직도 갖고 있느냐고 그만 좀 버리라고 엄마에게 잔소리했다.
오빠가 엄마 아빠와 살던 집을 떠난다고 했다. 엄마의 살림들을 정리한다고. 엄마가 애지중지 아끼느라 쓰지도 못하고 묵힌 그릇과 오래되어 빛바랜 살림들. 나는 모두 버리라고 했다. 다만 엄마가 새로 장만하고서 뛸 듯이 기뻐했던 6인조 찻잔 세트를 챙겼다. 집에 손님들이 오면 내놓을 변변한 찻잔이 없다고 자주 끌탕 하다가 마련했었다. 이젠 그마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실금이 가 있었다. 그래도 엄마를 모시는 심정으로 가져왔다. 달고나 국자도 함께.
부산 감천 마을 여행을 갔을 때다. 마을 입구에 달고나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사람들은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우리는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그곳을 지나리라 생각했다. 먹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들을 이따가 가면서 사자고 달랬다. 그런데 감천 마을은 길 따라 걷다 보면 처음 들어간 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나가는 길이 따로 나 있었다. 달고나를 사려면 다시 입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커다랗게 도는 동네 한 바퀴에 지친 우리는 달고나를 포기하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때 사 먹지 못한 달고나는 오랫동안 아이들의 뇌리에 남았고 여행 때마다 떠올렸다. 이후로 다닌 여행지에서도 이상하게 달고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때 아이들이 못 먹은 달고나를 해보려고 했다. 한참 후에야 달고나에 없어선 안 되는 소다를 사 왔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설탕은 여전히 빨리 녹았고 소다의 양을 맞추지 못해 달고나는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접시에 놓고 눌렀더니 이번엔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옆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보던 아이들이 한 조각 맛을 보고 쓰다며 인상을 찌푸린다. 실망의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니들이 달고나 맛을 알아? 나도 한 입 먹어 본다. 설탕의 단맛과 소다의 쓴맛이 어우러진 오묘한 조화. 역시 실패다. 엄마의 국자로 달고나는 안 되는 건가.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 국자의 이름은 달고나 국자다. 지금도 내 주방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