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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돈짜리 순금반지

by 세번째 삶






엄마는 기운이 없다며 방에 누워 계셨다. 머리맡에 앉은 내게 엄마가 핏기없는 손을 내밀었다. 그날따라 엄마의 손이 예뻐 보였다. 내가 알던 주름지고 마디가 굵어진 손이 아니라 유난히 하얗고 매끈해 보이던 손. 고된 일로 거칠어진 손등에 예쁜 반지 한번 맘껏 끼워보지 못한 손가락인데. 이제는 진통제의 붓기로 핏줄이 보일 만큼 하얗게 투명해져 고생 모르는 손 같다. 내민 손을 잡았다. 엄마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 우리 엄마 손이 예쁘네.


엄마는 기쁜 듯이 손을 당겨 마치 남의 손인 듯 한참을 바라본다. 엄마도 나도 엄마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본 듯 오랫동안 쓰다듬고 바라보았다.




엄마는 변변한 반지가 없었다. 결혼할 때 받은 패물은 언젠가 모두 도둑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로 중년이 될 때까지 금반지 하나 갖지 못했다. 딸에게는 실반지라도 사줬지만 당신이 낄 반지는 사지 않았다. 남의 잔치에 가거나 특별한 날이면 꺼내어 끼는 진주 반지 하나와 붉고 둥근 알이 박힌 반지 하나가 다였다. 지금은 흔한 게 금반지인데 엄마의 반지는 금이 아니었다.

1988년 용띠 해에 용이 그려진 쌍가락지를 끼면 장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삼 남매도 엄마에게 유행하던 쌍가락지를 선물했다. 많이 망설였던 거 같다. 그냥 지나가면 아쉬울까 봐 은가락지라도 하자고 했다. 금반지라면 더 좋았겠지만 학생이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거다. 그런데도 엄마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하얗게 빛나던 은가락지는 울퉁불퉁한 용무늬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골마다 까맣게 때가 낀 듯 보였고 그제야 엄마는 그 반지를 빼놓았다.

한참 후에 엄마에게 금반지를 사드렸다. 이모들과 반지 계를 해서 엄마도 금반지가 생겼지만 알록달록한 보석이 박혀서 일할 때 끼면 불편하다고 했다. 순금반지를 고르는데 엄마는 무거운 건 싫고 매일 끼고 다닐 수 있게 가는 반지로 하라고 했다. 그때는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해 한 돈짜리 순금반지를 해드렸다. 엄마는 자식들 돈 쓰는 게 부담스러워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내가 결혼할 때 받아 보관만 하던 순금 가락지를 껴보니 일할 때 그리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엄마는 암 투병하며 장신구를 다 빼놓았다. 이젠 챙길 여력도 없다며 나에게 그걸 전했다. 경황없는 중에 잃어버릴지 모르니 잘 두라고. 그게 얼마나 한다고 그냥 엄마가 끼고 있으라고 했더니 이제 손이 부어서 반지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에게 받은 엄마의 패물은 너무나 보잘 게 없었다.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몇 개의 반지와 자식들이 해 준 반지 목걸이 한두 개가 다였다. 그 안에 순금반지가 있었다.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엄마의 금반지를 꺼냈다. 아끼지 말고 끼라는 자식들 말대로 늘 끼고 있었기에 순금반지는 원래 모양대로 동그랗지 않았다. 엄마의 손 모양을 따라 조금씩 굽어 있었다. 조심스레 엄마의 반지를 껴 보았다. 가장 굵은 엄지손가락에 끼워도 걸리는 데 없이 헐렁해서 빠질 거 같았다. 열 손가락 모두에 껴 보는데 마침 오른손 중지는 마디가 굵어 반지를 끼고 뺄 때 조금 덜커덩거렸다.

나는 엄마의 금반지를 가운뎃손가락에 끼웠다. 엄마가 다시 옆에 있는 듯이 든든했다. 가끔 허전함을 느낄 때면 혹시나 저도 모르게 흘러내려 빠지지 않았을까 다른 손가락으로 반지를 더듬는다. 반지가 아직 있다는 것에 안심. 엄마의 금반지를 끼고 다니며 엄마가 또 사라질까 불안한 아이처럼 손가락으로 그 반지를 굴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엄마의 반지를 끼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두드리지 않을 때쯤 그 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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