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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들기름의 맛

by 세번째 삶

엄마는 가끔 들기름을 가져왔다. 아는 데서 직접 짠 거라 진짜 들기름이라고. 식용유를 섞어 만든 가짜 기름 얘기가 한동안 떠돈 후였다. 방앗간에서 짠 들기름은 옛날 소주병에 담아 플라스틱 뚜껑을 닫는다. 혹시나 귀한 기름이 샐까 봐 신문지로, 비닐로 몇 번이나 꽁꽁 싸서 가방에 넣는다. 그렇게 소중하게 들고서 엄마는 전철을 타고 온다. 나는 엄마에게 무거운데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잘 먹지도 않는다고. 열기 불편한 기름병에 담긴 들기름보다 슈퍼에서 파는 간편한 뚜껑의 참기름에 더 손이 갔다. 엄마가 가져왔으니까 얼른 먹어야지 하는 기특한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사실 들기름을 써야 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엄마가 새 병을 가져오도록 이전 병이 그대로 있을 때도 있었다. 애써 가져온 들기름을 못 먹고 버리게 되면 엄마는 그게 얼마나 맛있고 좋은 건데 하고 말끝을 흐리셨다.

기름을 가져올 때 엄마는 장에서 나물거리를 사다가 무쳐준다. 나물 반찬이라고는 먹을 줄만 알았지 할 줄은 모르는 딸을 위해. 엄마는 나물을 무칠 때 들기름을 따르고 기름병 주둥이에 흐르는 기름을 손가락으로 훑어 쪽 빨아 먹고 입맛을 짭짭 다시면서 맛있다를 연발했다. 참기름보다 들기름이 훨씬 향기롭고 고소하다고 했다. 나는 들기름 맛을 모른다. 들기름이나 참기름이라고 씌어있지 않으면 구분도 못 했다. 다만 들기름은 빨리 찌들어 버린다는 건 경험으로 안다. 방부제 없는 진짜 들기름이라 그랬을까.




얼마 전 요리에 관심이 생긴 아이가 집에 들기름이 있느냐고 물었다.


- 들기름은 없는데. 뭐 하려고?

- 두부 무침 하는데 들기름이 필요해요.

- 두부 무침? 그게 뭐지? 그냥 참기름으로 하면 안 돼?


아이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배운 대로 두부 무침을 한 그릇 만들었다. 들기름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다는 말과 함께. 처음 먹어보는 두부 무침. 그냥 두부를 데쳐 참기름 양념에 무쳤단다. 이렇게 간단하게 반찬 한 가지가 되다니. 신기해하며 아이의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며칠 후 아이는 집 앞 마트에도 들기름을 팔더라고 했다. 엄마가 가져오던 들기름처럼 아직도 시장 기름집에나 가야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들기름도 참기름처럼 마트에서 살 수 있구나. 그러고 보니 직접 들기름을 산 적 없었다. 관심이 없으니 파는 줄도 몰랐겠지.

아이를 위해 들기름을 샀다. 또 찌들어서 버리는 일이 없도록 가장 작은 병으로. 들기름을 넣고 무쳐 먹을 취나물도 한 봉지 샀다. 이번엔 엄마 손맛 취나물에 도전해 볼까. 취나물 손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아이가 유튜브로 요리를 배운다기에 세상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고서 나도 인터넷을 통해 음식을 만든다.




취나물을 다듬고 씻어 억센 기가 빠지도록 데친다. 건져낸 나물을 꼭 짜서 물기를 뺀다. 다진 마늘과 다진 파, 소금과 들기름을 넣어 무친다. 엄마가 하던 대로 나물 한 줄기를 집어 들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에 넣었다. 입안에 고이는 고소하고 달짝지근하고 쌉싸름한 취나물의 맛. 그 끝에 들기름의 달콤함이 따라온다. 엄마가 즐겨 사용하던 진한 들기름의 향이 어디 멀리에서 전해져 오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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