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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Nov 08. 2019

카프카 <어느투쟁의 기록>을 읽고

그들은 누구와 투쟁하는가

    카프카는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를 쓴다고 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줄곧 앞의 이야기와 연결지으려 애쓰지만, 그려지는 상황조차 말끔히 정리되지 않는다. 그런 형편이니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없다. 실체와 비실체가 뒤섞이고 실제와 상상이 혼재된 상황 속에서 다만 걷는 사람들과 발 달린 것들, 이어지는 대화. 주고 받는 말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골몰하다가 나가떨어지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와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만리장성의 축조」에서 사람들은 지휘부가 누구인지, 그들이 정확히 어떤 것을 의도하는지 모른 채 내려진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전해져 오는데 오래 걸려 이미 죽은 자들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현존하는 법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지시와 경고만을 따르는 삶을 살면서도 왕의 칙명을 한번이라도 듣기를 희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므로 혹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 왔으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의 말을 따른다. 누구도 본 적 없는, 지휘부가 당신들을 통치하기 위해 복종과 희생을 기대하고 있으니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면서. 누구에게 좋을 것이며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칙명을 내린 왕의 인정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단식 광대」에서 단식 광대는 누구보다 단식을 잘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러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대중의 인정을 요구하며 단식을 더 오래 하고 싶어 하지만 단식의 최장기간을 사십 일로 정해 놓은 규칙 때문에 좌절하게 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어 서커스의 짐승우리 근처에서 단식을 하게 된 그는 원하던 대로 사십 일 이상 단식을 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사실 그저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에 단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단식에 경탄하기를 바랐고 사람들은 경탄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다만 그녀의 예술에 대한 공공연하고 확실한 인정, 시대를 넘어 지속되는,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는 인정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른 것은 거의 모두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이것은 끝까지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P320,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그녀 스스로 노래로부터 떠나갔고, 대중들 사이에서 얻었던 권력을 스스로 파괴했다. 그녀는 숨어버렸고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은 조용하고, 실망의 빛을 보이지 않으며, 당당하다. 우리 종족은―겉으로는 반대로 보이지만―문자 그대로 선물을 단지 줄 수 있을 뿐 한 번도 받을 수 없는, 요제피네에게서도 받을 수 없었던, 내면으로 침잠하는 종족인 것이다. 이러한 종족은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P326,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요제피네는 자신의 종족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종족을 떠나버렸다. 스스로 떠날 수 있었지만 떠나지 않고 죽음을 맞은 단식 광대와 달리 요제피네는 종족의 무리를 떠났다. 그러나 대중은 그녀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침묵하며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독수리」에는 독수리에게 발을 계속 쪼이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발을 내어준 사람이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계속해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독수리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며 더 큰 고통을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 요제피네와 단식 광대에게서도 보인다. 독수리에게 발을 쪼이는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챈 독수리가 ‘그 부리를 곧장 나의 입을 통해서 내 몸 깊숙이 찔러 넣고 나의 피 속에서 헤어날 길 없이 빠져 죽어갈 때’ 해방감을 느꼈다. 그처럼 요제피네와 단식 광대도 관심과 인정을 준다면서 고통도 함께 준 대중에게 마지막 순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은 너희들도 나에게 속은 거야, 라며 통쾌한 마음으로 삶을 마감하려 한 것이다.


  「시골 의사」는 자기가 진료해야 할 마을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바쳐 그들을 만족시키고자 노력한다. 자신이 경멸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시골 의사와 단식 광대와 독수리에게 쪼인 사람 모두 그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자신을 삶을 마감하면서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그 또한 어리석음 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느 투쟁의 기록」에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으나 따라 나선 그는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샛길로 가다가 넘어져서도 찾아온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애쓰던 위 작품의 주인공들은 결국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저 투쟁을 할 뿐이다. 요제피네처럼 대중을 떠나버리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대중에게 인정받고자 떠나지도 못하고 투쟁하면서 끊임없이 길을, 이미 끝은 정해져 있는 길을 그저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옷을 입고

흔들리면서 자갈밭으로 산책하러 간다.

저 멀리 언덕으로부터

머나먼 언덕까지 펼쳐져 있는

이 거대한 하늘 아래서.


-카프카, <어느 투쟁의 기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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