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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Sep 07. 2021

숨길 수 없는 도피의 본능

마쳐야 할 숙제가 있어 새벽에서야 잠들었다. 아이들 원격 수업 시간에 맞춰 알람이 울리고 화들짝 깨어나 아이들 방문을 여니 이미 기상.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구나. 오전 모임에 겨우 시간 맞춰 참석하고 난 뒤 병원에 들렀다.


혈액 검사 결과 철분도 비타민D도 형편없이 바닥을 찍고 있다고 했다. 약을 먹는 것보단 주사를 맞는 편이 효과는 빠를 것이라고. 비타민D 주사는 엉덩이에 한 대, 2달에 한 번, 다섯 번을 맞아야 한다. 철분 주사는 한 방 맞는 줄 알았는데 작은 팩에 든 수액으로 10여분을 맞아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총 다섯 번. 설명을 들으니 약 먹는 것보단 효과도 빠르고 편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병원에 자주 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맞아야지. 그것 때문에 더 피곤하고 힘들었을 거라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요즘 피곤에 절어 허덕이는 내 체력 상태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참이니까. 찾아보니 2년 전쯤에도 비타민D 주사를 맞았는데  벌써 약발이 다 된 건가 보다. 다 맞는데 10개월이 걸리는데 처음 맞은 시점에서 2년이라고 보면 효과는 끽해야 일 년 정도인 건가.


주사를 맞고 점심 장을 봐서 집에 갔더니 아이들의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 있다. 중학생 작은 아이의 점심은 12시 반부터, 고등학생 큰 아이의 점심은 1시부터.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큰 아이는 혼자서 밥을 거의 다 먹은 후였고 작은 아이는 벌써 점심을 먹고 5교시에 들어가 있었다. 학교가 다르니 집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함께 밥을 먹기 어렵다. 아침은 물론 가장 늦게 일어난 엄마 덕에 1교시 전에 먹지 못했다. 학교에 등교할 때는 그래도 시간 맞춰 아침을 챙겨주려 노력하는데 원격 수업을 할 때면 나도 한없이 늘어져 으레 껏 건너뛰게 된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주사 맞은 후유증인지 어제 잠을 얼마 못 잔 탓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져 읽던 책을 덮고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기로 했다. 눈을 따뜻하게 해주는 안대를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잠과 노래 사이를 헤매다 한 시간. 일어나 저녁을 물으니 아이들은 아직 괜찮다고 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아침 모임에서 얘기가 나왔던 비 오는 풍경 영상에 추가되면 좋을 부분들이 생각나서 삼각대를 챙겨 집을 나섰다. 가다 찍고 가다 찍고.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새롭게 바라보면 새로이 찍을 거리가 생긴다. 혼자 삼각대를 들고 다니며 찍다 보면 의도치 않게 비도 맞게 되는데 오늘은 날이 선선한데도 땀을 흠뻑 흘려 비 땀범벅이 되었다.


금방 아이들 저녁 시간이 되어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몸 상태가 안 좋다. 으슬으슬 추운 게 얼른 이불을 뒤집어써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설거지는 해둬야 내일 아침에 편하겠거니, 억지로 설거지를 하고 아이에게 빨래의 건조를 맡기고 두꺼운 이불을 꺼내어 덮고 누웠다. 이불속에서도 찬 손발이 떨려왔다. 아,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열이 난다는 건 어떤 의미지? 좀처럼 없었던 일이 생기니 온갖 걱정에 머릿속이 시끄럽다. 아까 병원에서 철분 주사를 맞은 뒤 소변 색깔이 너무 붉은빛이어서 잠시 놀랐는데 그것 때문일까? 아니면 좀 전에 비 맞고 젖은 채로 땀을 흘리고 다녀서 일까? 아니면 코로나? 그렇게 되면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편 회사는? 내일 내 출근은? 오늘 아침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병원은? 폭포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는 생각들과 함께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땀을 푹 흘리고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열은 약간 내린 것 같다. 여전히 월요일의 숙제는 남아있고 아프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일어나 책을 펼쳤다. 얼른 해치우고 해열제를 먹고 다시 자야지. 휘리릭,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안 했다고도 할 수 없는 숙제를 해버리고 해열제를 먹는다. 이미 열은 내린 듯 추운 것은 덜 했지만 마치 백신 예방 접종했을 때 증상처럼 근육통에 열도 나고 목도 아픈 것 같아 예방 차원에서 약을 먹었다. 30분에 한 번, 한 시간에 한 번, 몇 번이나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나니 좀 나은 것 같다. 다행히 내일 아침 출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코로나 걱정도.  




그동안 한 달여, 크게 마음 써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폭풍 같이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체력은 바닥이 났다. 왜 그랬을까.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을까. 의식적으로는 거부하고 있었을 도피의 본능을 몸이 먼저 알아채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어떤 것으로부터 숨고 싶었는지 어떤 이유로 나를 혹사시켰는지 천천히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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