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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ul 27. 2020

오늘도 실패

타인의 욕망은 어디에나 있다


오늘도 나는 타인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어느 순간 남의 욕망을 무작정 따라 하는 내가 보였고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맘먹었는데. 또다시 원점이다.

듣고 있는 강의의 과제를 위해 서점에 들렀다. 입구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알록달록 진열된 문구 쪽에 먼저 눈길이 갔다. 서점 방문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쪽으로 다가가는 내 발길을 보았지만 이 정도 딴짓은 괜찮겠지, 슬쩍 눈을 감는다. 때마침 나에게 잘 맞는 필기구와 종이를 찾아보라던 강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 걸음은 허락이라도 받은 듯 의기양양해졌다.


서점에는 내가 좋아하는 빨강머리 앤이나 어린 왕자 캐릭터의 문구가 있다. 하지만 캐릭터 수첩은 들고 다니기 민망할 만큼 화려했다. 화려한 무늬가 내 취향이긴 한데 간단한 메모용이나 글을 쓰는 용도로는 맞지 않아 보였다. 단색의 스프링 노트들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았다.


서점에 보러 온 책은 뒷전이고 몇 분째 문구 코너만 빙글빙글 돈다. 여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작은 문구류와 캐릭터 펜이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지난번에 산 꽃무늬 펜은 생각보다 필기감이 좋지 않았다. 펜은 겉모양만으로 골라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오늘은 그래서 샘플이 있는 펜으로 써보고 고를 것이다.


그때 눈에 띈 '특가 판매 900원'이라는 안내 표지. 그 아래 달려 있는 펜은 '무민'이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무민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굳이 싫어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빨강머리 앤이라면 모를까 무민이 나를 움직이진 못한다. 그런데 무민을 보는 순간 내 지인 중에 무민이라면 껌뻑 죽는 이가 떠올랐다.


이걸 사다 주면 아주 좋아하겠지? 900원밖에 안 하니 부담스럽지도 않고. 내가 갖고 어서가 아니라 무민을 좋아하는 누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니까. 사야 할 정당한 이유가 생겼다.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무민이 달려 있잖아? 그리고 어떤 펜보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이제 몇 개 안 남았으니 사려면 지금 사야 해! 내 마음은 벌써 그 펜을 선택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욕망은 내 안에 자리 잡았고, 나는 이유를 갖다 붙이느라 애썼다.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펜은 내가 갖고, 그이는 하늘색으로 하는 게 좋겠어. 그이가 좋아하는 색은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지인을 생각하며 기로 한 펜은 어느새 내 욕망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펜 두 자루를 골랐다. 계산을 마친 후 가방에 펜을 넣으며 그이를 만난 지 일 년도 넘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어떻게 전해주지?


그제야 펜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온갖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던 내가 보였다. 900원의 덫에 걸려 타인의 욕망을 끌어들였다.

아, 나는 타인의 욕망을 따라 오늘도 내 거짓된 욕망을 채우고는 기뻐했구나. 결국 10분 전만 해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던 무민은 나의 욕망으로 둔갑하여 내 필통에 자리를 잡았다. 타인의 욕망으로 물든 나를 깨끗이 비우고 나의 욕망만을 보려던 나의 계획은 오늘도 실패다.







Oh, No!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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