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타인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어느 순간 남의 욕망을 무작정 따라 하는 내가 보였고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맘먹었는데. 또다시 원점이다.
듣고 있는 강의의 과제를 위해 서점에 들렀다. 입구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알록달록 진열된 문구 쪽에 먼저 눈길이 갔다. 서점 방문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쪽으로 다가가는 내 발길을 보았지만 이 정도 딴짓은 괜찮겠지, 슬쩍 눈을 감는다. 때마침 나에게 잘 맞는 필기구와 종이를 찾아보라던 강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 걸음은 허락이라도 받은 듯의기양양해졌다.
서점에는 내가 좋아하는빨강머리 앤이나 어린 왕자 캐릭터의 문구가 있다. 하지만 캐릭터 수첩은 들고 다니기 민망할 만큼 화려했다. 화려한 무늬가 내 취향이긴 한데 간단한 메모용이나 글을 쓰는 용도로는 맞지 않아 보였다. 단색의 스프링 노트들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았다.
서점에 보러 온 책은 뒷전이고몇 분째 문구 코너만 빙글빙글 돈다. 여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작은 문구류와 캐릭터 펜이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지난번에 산 꽃무늬 펜은 생각보다 필기감이 좋지 않았다. 펜은 겉모양만으로 골라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오늘은 그래서 샘플이 있는 펜으로 써보고 고를것이다.
그때 눈에 띈 '특가 판매 900원'이라는 안내 표지. 그 아래 달려 있는 펜은 '무민'이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무민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굳이 싫어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빨강머리 앤이라면 모를까 무민이 나를 움직이진 못한다. 그런데 무민을 보는 순간 내 지인 중에 무민이라면 껌뻑 죽는 이가 떠올랐다.
이걸 사다 주면 아주 좋아하겠지? 900원밖에 안 하니 부담스럽지도 않고. 내가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민을 좋아하는 누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니까. 사야 할 정당한 이유가 생겼다.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무민이 달려 있잖아? 그리고 어떤 펜보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이제 몇 개 안 남았으니 사려면 지금 사야 해! 내 마음은 벌써 그 펜을 선택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욕망은 내 안에 자리 잡았고, 나는 이유를 갖다 붙이느라 애썼다.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펜은 내가 갖고, 그이는 하늘색으로 하는 게 좋겠어. 그이가 좋아하는 색은 모르지만,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지인을 생각하며 사기로 한 펜은 어느새 내 욕망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펜 두 자루를 골랐다. 계산을 마친 후 가방에 펜을 넣으며 그이를 만난 지 일 년도 넘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어떻게 전해주지?
그제야 펜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온갖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던 내가 보였다. 900원의 덫에 걸려 타인의 욕망을 끌어들였다.
아, 나는 타인의 욕망을 따라 오늘도 내 거짓된 욕망을 채우고는 기뻐했구나. 결국 10분 전만 해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던 무민은 나의 욕망으로 둔갑하여 내 필통에 자리를 잡았다. 타인의 욕망으로 물든 나를 깨끗이 비우고 나의 욕망만을 보려던 나의 계획은 오늘도 실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