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번째 삶 Oct 04. 2021

호야 꽃과 함께 한 2주

수동으로 타임랩스 찍기

2주 전, 호야 꽃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멍울부터 시작된 꽃망울은 점점 커지더니 터질 듯 영글어갔다. 개업했던 가게 선물로 누가 가져온 호야는 그때 받았던 무수한 화분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벌써 6년쯤 되었나. 대단한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지 못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주는 것이 고마웠는데 작년부터는 탐스런 꽃도 핀다. 처음엔 신기하고 놀라워서 매일 들여다보았다. 그 꽃이 모두 진 뒤에는 또 금방 다른 자리에 꽃이 피어서 놀랐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는 베란다 구석 쪽으로 꽃망울이 생겨서 꽃이 거의 다 진 뒤에 발견을 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 와서 꽃 피우는데 5년이나 걸렸는데 한 번 피우기 시작하니 꽃이 핀 데 또 피고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였다. 이번에도 지난번 꽃망울이 열렸던 자리에 또 생겨났다. 얼마 전 피었던 꽃에 꽃물이 잔뜩 달려 있던 생각이 나서 꽃이 벌어지는 모습을 찍어보기로 했다. 꽃은 또 피어나겠지만 혼자서 피었다 지는 꽃을 좀 더 잘 보려고 기록을 시작했다.


타임랩스라는 영상 촬영 기법이 있다. 저속으로 사진을 찍어서 빠르게 재생하는 것이다. 몇 년 전 타임랩스 영상을 찍었던 기억이 나서 요즘 소홀했던 오래된 카메라로 찍어보려 했는데 아무리 뒤져도 타임랩스 기능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래된 모델이라서 그 기능이 없었나 보다. 그럼 예전에는 어떻게 찍었지? 찾아보니 스마트폰으로 찍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폰으로 찍어볼까 했는데 꽃의 변화를 찍으려면 며칠을 찍어야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 폰이 아니고서야 며칠씩 삼각대에 묶어둘 수는 없다. 태블릿으로 해볼까 생각해 봐도 삼각대에 고정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결국 타임랩스 기능이 없는 내 오래된 카메라로 수동으로 타임랩스 영상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말이 좋아 타임랩스지 그냥 타이머 맞춰 영상이나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마침 추석 연휴라서 자주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삼각대를 설치하고 처음엔 두 시간에 한 번씩 사진을 찍고 영상도 10분씩 찍었다. 두 시간에서 한 시간 반에 타이머를 맞춰두고서 꽃 봉오리가 열리는지 관찰했다. 문제는 오래된 카메라고 전원 연결선이 없이 배터리를 충전해서 써야 했고 배터리는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카메라를 열심히 활용하던 십 년 전쯤에는 그걸로도 충분했는데. 배터리가 다 되거나 영상을 저장하는 메모리가 다 되면 삼각대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충전하거나 메모리를 비운 뒤에 다시 설치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연휴가 길었기에 망정이지 금방 포기했을 수도 있는 귀찮은 일이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그거 하면 얼마를 주느냐고 물었다. 누가 돈 준다고 하면 했으려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 끈기가 부족한 나도 이번에는 호기심 덕분에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연휴가 끝나고 출근하는 동안에는 영상을 길게 찍는 것은 포기하고 짧게 몇 초간 찍거나 사진만 찍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사진을 찍고 출근하기 전에 찍고 퇴근해서 찍고 밤에 잠들기 전에 찍었다. 밤에는 조명이 어두워 꽃이 잘 안 보여서 조명까지 앞에 세워서 찍었다. 그런데 그 조명이 꽃이 벌어지는데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꽃도 낮에 햇볕을 쬐고 밤에는 자는 시간으로 알고 있을 텐데, 갑자기 인공조명이 밝혀지니 다시 낮인가 하고 일을 할 것 같아 며칠 후에는 밤 조명을 껐다. 찍은 영상을 대충 확인해 보니 주로 밤에 벌어지던 꽃봉오리가 신경 쓰여서였다.



그렇게 세워두었던 삼각대와 조명을 어제 치웠다. 남아 있던 꽃이 모두 떨어져 버린 것이다. 마지막 몇 개의 꽃이 달렸길래 그 떨어지는 모습을 찍으려고 영상을 계속 찍고 있었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 중간에 꺼져 버렸다. 급하게 다시 충전을 하고 찍기 시작했는데 잠시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이번에는 절전 모드가 되어 영상은 중단되어 있었고 꽃은 이미 다 떨어져 있었다. 다른 작업을 하느라 아직 찍힌 영상을 확인하지 못했다. 마지막 낙화를 못 찍었다면 운이 없었던 거지, 생각하며 그새 먼지가 쌓인 조명과 삼각대를 접었다. 시작한 날을 찾아보니 꼭 2주가 되었다. 추석 전날 보름달이 카메라 앵글에 함께 잡혔었는데, 어느새 10월이 시작되었다. 꽃이 벌어진 지 2주 만에 별처럼 활짝 피었던 꽃은 모두 떨어졌다. 드문드문 남기긴 했지만, 수동으로 만드는 타임랩스가 타이머도 제각각 앵글도 제각각으로 어설프겠지만 호야 꽃과 함께 한 2주 동안 내 시간을 들여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막 여우와 어린 왕자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8월의 마지막 월요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