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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Aug 30. 2021

8월의 마지막 월요일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어제 분명 늦게 잠이 들었는데. 큰 아이의 등교 시간에 맞추어 아침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십오 분 정도 남았다. 일어날까, 좀 더 누워 있을까. 나는 좀처럼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지 못한다. 알람이 울려도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더 많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며칠간 잠이 부족하여 앉아서도 어지럼증을 느끼던 차였는데. 좀 더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의 가지를 뻗다가 알람이 울려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병원에 가야겠다.


아이가 등교한 뒤, 침대 시트를 걷어 세탁기에 넣고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한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영상 편집 생각이 나서 모처럼 촬영용 삼각대를 챙겨 집을 나섰다. 몇 발자국 걷고 찍고, 걷고 찍고. 매일 보는 길인데, 뭘 찍어야 할까 하는 생각과 달리 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어느새 능소화가 가로등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고 엊그제만 해도 있던 가게는 간판을 바꿔 달았다. 뒤죽박죽 떠오르는 대로 구성과 내용을 떠올리며 영상을 담다 보니 벌써 열한 시. 이러다간 병원 점심시간 전에 못 가겠다. 서둘러 걷는다.


병원에는 앉아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예약시간보다 오래 기다릴 수 있다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접수를 한 뒤 사람 많은데 앉아 오래 기다리기도 탐탁지 않아 잠깐 나갔다 와도 되는지 간호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냐길래 한 삼십 분 정도라고 답했다. 간호사는 그 이상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서둘지 말고 천천히 다녀오라고 이른다. 예전엔 대기가 길어도 간호사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는데 환자가 많아서 대기 시간이 더 길어졌구나, 체감한다. 다시 병원 주변과 근처 시장을 돌며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매일 빠르게 걷느라 지나쳤던 골목,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 낡아버린 동네가 발걸음마다 즐비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이르러 보니 운동장 한쪽을 잔뜩 파헤쳐 놓았다. 며칠 전 아이로부터 학교에 체육관 짓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반일 때 운동장 한 구석에 강당이 세워졌고 거기서 졸업식을 했다. 벌써 중학교 졸업반인데 이번에도 새로 지어진 체육관에서 졸업식을 하게 되려나. 그때쯤엔 모두 모여서 졸업식을 할 만큼 코로나 시국에 안정이 오려나.


다시 병원에 돌아가서 보니 아직도 내 앞에 대기자가 여덟 명이다. 벌써 열두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오늘 혈액검사를 위해 아침 금식하고 왔는데. 이러다가 점심시간 지나서 검사를 해야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열두 시가 막 지난 시간, 드디어 진료 시작. 아침부터 꽤 많은 환자에 시달렸을 원장님은 그래도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한다. 혈액 검사 결과를 보고 약을 더 먹을지 정하자고, 운동은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뭐라 답해야 할까. 따로 운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출퇴근하느라 전철 타고 버스 타고 걷기만 하루 육천 보 정도를 걷는데, 그것도 운동이라면 운동일까.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런 생각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그저 소리 없이 웃었다. 왜 자신 없이 웃으시냐고, 자신 있는 분들은 이런저런 운동했다 얘기를 하는데 안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걷기를 조금 한다고 들릴 듯 말 듯 마스크 속에서 중얼거리고는 며칠 전부터 약간의 어지럼증이 생겼다고 말했다. 차트를 확인하더니 전에도 약간의 빈혈이 있었다고 했다. 지난번 혈액 검사 후에 '철이 없어도 너무 없네요'라고 했던 원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산부인과 진료를 권하기에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 검사도 했지만 크게 이상은 없다고 했다. 이번에도 빈혈이면 철분 주사를 맞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덕질하느라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혈액검사를 통해 결과가 나올 것이니까.


약국에 들러 약을 사고 시간을 보니 집에서 원격 수업 중인 작은 아이의 점심시간에 가까웠다. 뭘 사갈까. 요즘은 집에서 해 먹는 음식보다 사 먹는 음식이 훨씬 많다. 언젠가부터 그게 당연시된 것만 같다. 햄버거? 김밥?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더니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린다. 아직 수업 중이군. 그럼 그냥 김밥으로 결정. 자주 가던 김밥집에 오랜만에 갔더니 계란 김밥과 참치 김밥 가격이 오백 원씩 올라서 한 줄에 사천 원이 되어 있었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먹거리의 가격은 너무 빠르게 오른다. 김밥을 사서 다시 천천히 집으로 걷는 길. 오늘은 출퇴근 때보다 더 많이 걷는다. 벌써 육천 보가 넘었다. 작은 아이에게 전화가 온다. 이제 점심시간이라고, 라면을 끓이려던 참이라고. 그럼 라면을 하나 끓여 같이 먹자고, 엄마가 김밥을 사 가지고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일렀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으며 늘어진 능소화를 지나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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