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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Nov 15. 2021

이상한 나라에서

바보 같았지만 나쁘지 않아

영화 시작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 11분, 걸어가면 30분이 걸린다. 그럼 천천히 걸어가 볼까. 처음 가는 곳이지만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낮동안의 비로 바닥은 젖었고 바람은 차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아침에는 저녁의 산책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나와 목이 허전했다. 가방에 들어 있던 작은 꽃무늬 손수건을 목에 스카프처럼 둘러 묶고 씩씩하게 나섰다. 이십 년 전에나 걸었던 길을 서울 구경 처음 온 사람처럼, 더 넓어지고 더 복잡해진 길을 눈치껏 둘러보며 걸었다. 술집으로 그득하여 번화한 거리가 끝나갈 무렵 작은 라멘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이곳을 지나면 또 어디쯤에서 식사할 곳을 만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라멘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주 작고, 얼핏 보기에 일본 라멘집처럼 혼자 앉아 먹는 바 테이블만 있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눈에 양쪽 바 테이블이 꽉 찬 것이 보였다. 테이블 쪽을 바라 주방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분주히 돌아다녔지만 내가 들어온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다가 문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모니터를 발견했다. 요즘 작은 가게들 대부분이 무인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을 받으니 그런 것인가 하고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안내도 없고 전혀 알아볼 수 없어서 당황했다. 작은 가게 안 묵묵히 자기 앞에 놓인 그릇과 대면하고 있는 예닐곱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계산이요'하면서 일어났다. 여자가 따라 나와 계산을 며 나에게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키오스크라고 생각했던 모니터는 카드 결제를 하는 포스였고 이곳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주문을 받는 곳이었다. 자리를 정돈하고 안내해 주겠다는 말을 하고 여자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여자는 빈그릇을 치우고 간단히 테이블을 닦은 후 나를 보며 그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등받이도 없고 엉덩이를 겨우 올려놓을 수 있는 동그란 나무판은 하나의 기둥으로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빙글 돌아가는 의자에 억지로 엉덩이를 올려 앉으니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나는 펼쳐져 있는 메뉴판을 뒷장으로 넘길까 하다가 그냥 첫 페이지에 있는 두 개의 종류 중 위에 적힌 돈코츠 라멘을 달라고 했다. 테이블 , 그러니까 주방이 마주 보이는 쪽의 낮은 턱에는 작은 메모들이 한가득 붙어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무엇 무엇이 셀프 코너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꽂은 내 귀에는 말소리가 음악과 소음과 섞여 불분명하게 들렸다. 자리가 비좁아 들고 있던 우산을 놓을 곳이 여의치 않아 나는 우산꽂이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저 앞쪽에 있어요'라는 답을 들은 것 같다. 문 앞쪽으로 돌아가 둘러봤지만 셀프바와 정수기 말고는 다른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내 눈에만 보이지 않나 싶어 문 앞에서 제자리걸음으로 뱅글뱅글 서너 바퀴를 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더없이 바보 같아져서 좀 전 여자의 말소리를 복기해 짐작해 보았다. 문 앞에 있어요,라고 했던가 아님 문 밖에 있어요 라고 했던가. 아무리 봐도 이 안에 없으니 출입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문 밖에 있는 우산 꽂이에 우산을 두고 들어가는 것은 꺼려져서 그냥 우산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혼자 밥을 먹으러 가서 빠져드는 혼자 만의 세상, 손 안의 세상. 그러면서 내 머릿속에는 혼자서 여행했후쿠오카에서의 라멘집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방금처럼 바보같이 굴지 않았다. 오늘 나는 꼭 바보 같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마치 처음 가보는 낯선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나. 손 안의 세상에만 익숙해져서 실물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돈코츠 라멘이 나왔고 나는 셀프바에서 단무지를 가져왔다. 젓가락으로 후루룩 마시눈길 닿는 곳의 메모를 읽었다. 무료인 마파두부를 먹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쓰여 있다. 다시 일어나 마파두부를 조금 떠 다. 어지럽게 붙은 작은 종이들 사이에 백종원 사진이 있다. TV에 소개된 곳인가. 먹으면서 후쿠오카 숙소 앞에서 저녁 늦게 먹던 라멘을 다시 떠올렸다. 300엔이었나, 너무 저렴하고 맛있어서 놀랐었다. 400엔인 생맥주를 하나 먹을까 말까 맥주 한 잔이 라멘보다 비싸네, 망설이다가 라멘 한 그릇을 다 먹었던 기억. 이곳을 서울에 있는 작은 일본이라고 표현했다는데 먹으면서 일본을 떠올렸으니 그 말이 그 말이라고 봐도 되려나.


다 먹고 일어서는데 가게 안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나 말고 한 사람만이 라멘을 먹고 있었다. 계산을 해주는 여자는 내게 하필 사람이 많을 때 들어왔다며 웃었다. 맞장구치며 나는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바로 우산꽂이가 보였다. 바깥에 있는 하얀 우산꽂이, 왠지 낯설지만 한편 정겹다. 나는 누가 집어갈까 싶어 밖에 우산꽂이가 있어도 찝찝했는데. 바깥에 있는 걸 모르고 문 안에서 맴맴 돈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문 밖에 놓인 우산꽂이는 내 상상력의 범위  바깥에 있었다.


영화 시작 시간까지 한 시간 십 분쯤 남았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켜고 내 위치를 동기화했다. 지도를 보며 따라 걸었다. 머릿속으로 지도의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어 내 몸을 폰의 지도와 같은 방향으로 돌리거나 폰을 돌리며 방향을 맞춘다. 한참을 큰 길로만 가다가 여기로 들어가도 되나 싶은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두 갈래 길의 모퉁이에서 카페를 보았다. 지도를 보면서도 나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헤맸다. 지도가 있다고 헤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특히 나같이 방향감각이 둔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따라간 길에 작은 극장이 있었다. 극장 입구는 생각보다 좁았고 큰 입구가 있을 거라 생각해 건물을 따라 돌아갔다. 좀 전과 비슷하지만 약간 더 큰 입구가 있었다. 당연히 극장 입구라 생각하고 성큼 들어섰다. 안쪽에서 남자 직원이 인사를 했지만 극장 매표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카페인가, 하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려니 다시 자동 출입문을 통과해야 했다. 나가보니 좀 전 내가 지나쳤던 작은 문이다.


엘리베이터 옆 안내판을 보니 극장은 지하 1층이었고 위층은 다 카페 관련이었다. 왠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옆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진입금지에 불이 들어와 있다. 뭐지? 나는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 아까 인사했던 남자 직원에게 극장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카운터의 옆 쪽으로 난 계단을 가리켰다. 나는 내가 또 바보 같아서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극장의 작은 입구는 아주 오래전 가 보았던 소극장의 입구 같았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어두컴컴한 책상이 있고 한 사람이 지키고 앉아 표를 발권해 준다. 나는 낮에 인터넷으로 예매해 둔 전화번호 뒷자리를 불러 주었다.

 "7시 영화 맞으시죠?"

묻는 직원에게 나는 표를 받으며 멋쩍게 웃었다.

"너무 빨리 왔지요?"

직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상영관 입구 바로 옆놓인 하나뿐인 작은 벤치에 앉았다.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는데 손님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영화가 시작되려면 아직 50분이나 남았다. 나는 잠시 앉아 있다가 벤치에 앉아서도 손이 닿을 것만 같은 엘리베이터 문 옆상향 버튼을 눌렀다.


1층으로 올라가니 아까 작은 입구의 그곳. 다시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섰다. 오늘 이 문을 몇 번 통과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곳은 이상한 나라 같아. 어디로 가도 같은 곳이 나오고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미로처럼 얽혀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올랐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보니 1층에는 앉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좌석은 없는지 물었더니 2층과 5층에 있단다.


음료를 들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니 아무도 없는 회색의 차가운 공간이 보인다. 음료와 함께 내민 쿠폰에 쓰인 것처럼 지구로부터 화성에 도착한 것 같았다. 쿠폰에는 지구에서 화성까지 도장이 열개 그려져 있었다. 우주선을 타고 화성으로. 얼마 전 읽었던 마이클 콜린스의 '플라이 투 더 문'도 생각났다. 우연과 필연이 엉킨 것 같은 날이다. 나는 화성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음을 만끽했다. 진짜 화성이라면 신났을 수 없겠지만 이런저런 사진을 찍으며 나는 꽤 신났던 것 같다.


오늘 영화를 볼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지난주에 영화의 상영 소식을 들었고 내가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도 망설인 것은 내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보러 갈 만큼, 황금 같은 저녁 휴식 시간을 내어 갈 만큼 간절한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쉽게 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비가 오고 추워진다는 소식도 한몫했다. 하지만 오늘 오후가 되자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춥다고 해도 아직 한 겨울도 아닌데. 비 좀 오면 어때.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가 주겠지 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렇게 예매를 하고 걸어서 극장까지 왔다.


오늘은 아직 보지 못했던 내 배우의 작은 영화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이상한 나라와 거기서 헤매는 내 모습을 엉뚱하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인 나를 보는 것도 큰 수확이었다. 어쩌면 짜증이 났을 수도 있고 바보 같은 내 모습에 어처구니없어하면서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세계에 접속한 것 같아 뭔가 신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요즘 재미있는 일이 자꾸 일어난다. 삶의 활력을 얻는 것과는 별개로 평범한 일상에 작은 재미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 같은 것을 경험해도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란다. 나는 그 계기를 내가 애정하게 된 어떤 배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마치 오늘 나를 이상한 나라로 데려온 흰 토끼 같다. 오늘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나오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상한 나라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무엇에 홀린 듯한 바보 같은 내 모습을 모니터로 보는 듯한 경험도 좋았다. 어딘가 내가 많이 자란 느낌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내가 만든 이상한 나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상한 나라에서 또 새로운 출구를 통해 나를 즐겁게 살게 해 준 흰 토끼를 만나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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