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국 한 묶음 1300원. 끝부분이 하얀 꽃잎은 꽃술이 있는 가운데로 갈수록 자줏빛이 선명해졌다. 한 열 송이나 될까. 베이지색 종이에 싸인 작은 꽃송이가 나에게 손짓했다. 오늘 가려고 맘먹은 곳에 저 소국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몇 년 만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늘은 일이 있어 안 나왔단다.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고 소국을 다시 떠올렸다. 나를 위해 한 묶음 살까? 나만의 공간이 있을 때는 가끔 나를 위해 작은 꽃을 샀었다. 이제는 집에 꽂아 놓을 데도 여의치 않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를 만날 때면 내가 갖고 싶은 꽃을, 작은 꽃 묶음이나 꽃다발을 사서 선물하곤 한다. 오늘은 그럼 진짜 나를 위해 살까 다시 한번 망설이다 발길을 돌렸다. 겨우 1300원인데. 걷는 동안 뒤통수가 당겼다.
역 앞 광장에는 한바탕 쏟아진 비에 떨어져 내린 낙엽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쉬운 시간. 마침 일찍 퇴근한 남편에게 단풍 구경을 가자고 했다. 비 오는데? 그럼 비 오는 풍경이나 한 번 보구 오지 뭐.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부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걷는다. 멍하니 비를 피하던 나는 점심을 안 먹은 생각이 나서 광장 옆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예전에 몇 번 오뎅을 사 먹었던 적이 있는 곳이다. 네모칸으로 나뉘어진오뎅냄비에 담긴 오뎅을 하나 꺼내어 솔로 간장을 발랐다. 마스크를 벗고 오뎅을 천천히 먹고 있는데 주인이 종이컵에 오뎅 국물을 하나 떠준다. 아, 오뎅꼬치를 먹을 때 국물을 먹을 수 있었지.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으레껏하던 일도 잊고 있었다. 코로나때문에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뒤로 길에서 무얼 먹는다거나 한 적이 없으니 2년은 됐나보다. 길에서 오뎅을 사먹는 행위가 너무도 오래 전 일인 듯 낯설다.
뜨거운 오뎅 국물을 후후 불면서 마시는데 하얀 재킷에 하얀 정장 바지를 입고 힐을 신은 여자가 멀찍이 지나간다. 얼핏 그녀의 무릎이 시커멓다. 다시 한번 눈길을 주니 양쪽이 모두 무릎에 까만 자국이 있다. 빗길에 넘어진 걸까. 나는 웃을 생각도 없었고 살짝 애잔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녀의 눈치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아 보였다. 위아래로 하얗게 차려입고 나왔을 텐데 무릎에 까만 자국이라니. 민망할 수도 있겠으나 눈치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내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온 나도 그랬을 것이란 데 생각이 미쳤다.
오뎅꼬치 하나를 더 먹으려고 집어 들자마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온 건가? 한 손에 오뎅을 들고 한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제 출발한다고, 어디쯤 있느냐고 했다. 나는 택시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곳으로 가겠다 하고 집어 든 오뎅을 마저 먹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어 내밀자 주인은 천 원짜리 여덟 장을 세어 나에게 준다. 천 원짜리 오뎅을 팔아 받은 여덟 장의 천 원 지폐는 아마도 여러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리라. 나는 지폐에 묻은 코로나 균을 없애겠다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가 지폐가 타버렸다는 뉴스를 떠올리며 여덟 장의 꾸깃꾸깃한 지폐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남편과 차를 타고 어디로 가야 비가 와도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을까 궁리했다. 그런 곳이 따로 있을까? 그냥 비가 와도 보면 되지. 어제 가려다가 못 간 공원 방향으로 달렸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노란 은행잎이 소복하게 쌓인 가로수길을 만난다. 비가 안 왔더라면 더 좋았을 걸. 어제만 왔더라면. 하룻밤 사이 비바람에 낙엽들은 맥없이 쏟아져 내렸다. 공원에 들어서니 마침 비가 잦아들었다. 주차비 3천 원어치만 보고 가자. 우산 하나를 쓰고 2년 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왔던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에 젖어 바닥과 범벅이 된 낙엽을 밟으며. 손도 시리고 귀도 시린데 비는 자꾸 어깨를 적신다. 비가 와도, 낙엽은 신발에 자꾸 달라붙어도, 이미 나무들은 앙상한데도 오랜만의 산책은 좋았다. 그냥 집으로 가지 않길 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국 생각이 잠깐 났다. 1300원의 행복을 놓쳐 버렸지만 대신 빗속의 가을을 눈에 담았다. 주르륵주르륵 고였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카메라에 담았다. 왠지 비와 그리고 금방 자취를 감춰버릴 가을과 좀 더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