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나 역에서는 이케부쿠로역까지 한 번에 가는 열차가 있다. 쇼난신주쿠 라인은 JR라인이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도쿄와이드패스로 탈 수 있다.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데다 중간에 갈아탈 걱정이 없어서 더 좋았다. 여러 종류의 열차가 있어서 복잡하지만 라인이 색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빨간색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케부쿠로가 열차의 종착역이 아니라서 찾기가 까다로웠다. 우리가 지하철로 서울역에서 혜화역에 가려면 4호선 당고개행이나 진접행을 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착역이 아니라 중간 노선을 확인해야 했다. 혹시나 다른 라인을 타게 될까 봐 빨간 노선에 이케부쿠로가 쓰여 있는 것을 몇 번 확인한 후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열차를 타고 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렸다. 이케부쿠로역에 내리면 새로운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을 잠시 미루고 편안하게 열차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이케부쿠로 역내는 우리가 출발했던 후지사와나 오후나 역보다 훨씬 컸다. 처음에는 긴장감으로 그곳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가늠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지도를 한참 동안 살피고 방향을 잡으려 했으나 이케부쿠로역의 출구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교복을 입고 서성이던 여학생을 붙잡고 물어보니 열심히 지도를 보며 가르쳐 줬는데 출구 방향이 동서남북에 다시 동서남북이 있었다. 설명대로 갔으나 우리는 지하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방향을 잃어버렸다.
이날은 핼러윈데이라 지하철의 혼잡을 대비해서 그랬는지 지하도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에게 우리가 가는 호텔 방향을 물었다. 그는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아! 하고 어딘지 알겠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세하게 천천히 반복해 설명해 주길래 나는 천사를 만난 듯 기뻤다. 저렇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다니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거듭 감사를 표하고 그가 알려준 길로 나갔다. 하지만 우리가 나간 출구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가 설명해 준 곳은 우리가 찾는 곳이 아니었다. 이름을 착각해 경찰이 엉뚱한 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구글 지도를 보며 따라가자 또 방향은 이리저리 돌며 우리를 헷갈리게 했다. 다시 지하도로 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방향을 더듬었다.
다시 찬찬히 지도를 보니니 숙소는 세이부 백화점 방향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나갔던 쪽은 그 반대쪽에 있는 백화점이었던 것이다. 후지사와역에서와 똑같은 실수였다. 처음부터 큰 건물인 백화점을 기점으로 잡았더라면 지하도에서 뱅글뱅글 돌지 않았을 텐데. 역 주변의 백화점도 한두 개가 아니라 이름에 주의해야 한다. 세이부 백화점의 이정표는 아주 많았다. 우선 바깥으로 나가서 큰 건물을 보며 찾기로 하고 백화점 1층으로 나갔다. 구글 지도를 보고 걸어가는데 또 자꾸만 제자리걸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슬슬 지치기도 했고 자신에게 화도 났다. 왜 지도가 있는데 보질 못하니?
나 혼자서 화내고 절망하며 속으로 천불을 삭이는 동안 S는 침착하게 숙소 주소를 묻고 위치를 찾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지도를 꺼버리고 S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10여 분 걷자 드디어 숙소 근처라고 했다. S만 따라 걷다 보니 구불구불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왜 지도가 돌아가는 길로 가르쳐줬을까 했는데 S는 멀리 돌아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크게 ‘기역’ 자였는데 지도는 중간에 길을 여러 번 꺾고 꺾어서 가르쳐 준 것이다. 예전의 수학문제에서 거리 계산이나 경우의 수 찾기에 단골인 모눈 그림 같았다. 수학 문제라면, 크게 봤더라면 같은 거리임을 알아채고 편하게 한 번에 쭉 갈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도 시야가 너무 좁았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삶도 훨씬 간결해질 텐데. 수학은 수학으로만 여기고 이처럼 활용하지 못하면 많이 알아도 죽은 학문일 뿐이다.
2. 숙소 찾기의 숙제
이번에는 프런트에서 여권을 꺼내어 바로 체크인. 방을 찾아 들어가니 어메니티가 없었다. 어메니티는 프런트 옆에서 셀프로 챙겨가는 방식이었다. 방에는 큰 조명이 없고 부분 조명만 몇 개 있어서 전체는 아주 어두웠다. 어제 묵었던 숙소와 바로 비교가 되었다. 여행 커뮤니티에서 후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봤는데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역으로부터 걸어서 15분 거리라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평소 15분 정도 걷는 것이 뭐가 문제냐 생각했는데, 모르는 길을 헤매다 보니 30분 이상 지체되었다. 게다가 어두운 조명과 낡은 에어컨과 드라이어까지, 첫인상이 별로였다. 숙소는 각자 침대를 사용하는 트윈룸 중에서 방 크기가 약간 큰 곳을 우선으로 골랐다. 그런데 어제 묵었던 숙소와 비슷한 크기에 오히려 비용은 더 많이 들었는데 뭔가 속은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들의 후기는 완전히 믿을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 같다. 두 번의 숙소 선택 중 한 번은 실패다.
가방을 던져놓고 이케부쿠로 시내로 나갔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역으로 가야 하니 방향을 잘 확인하며 걸었다. 고가 다리가 지나가는 큰길 쪽으로 가니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부터 시야를 넓게 보았더라면 트렁크 가방을 끌고 배낭을 메고 그렇게 헤매지 않아도 됐을 텐데. 구글맵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잘 안 된다. 전체 지도를 그려보기, 여행에 갖춰야 할 필수 기술이다. 다음에는 꼭 기억하길. 걷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우리가 가려고 하는 영화관 건물이 보인다. 게다가 우리가 지나온 역 쪽이다. 아니까 이렇게 쉬운데, 모르니까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제 영화관의 위치를 파악했으니 전방으로 직진만 하면 된다. 안심이 되면서 배가 고파졌다.
여행 다니면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은 애초에 포기했다. 숙소 찾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맛집을 찾아 헤매야 하고 또 웬만한 맛집은 웨이팅이 길다는데 줄 서서 뭘 먹는 것도 전혀 내 취향이 아니기에 식사는 그때그때 눈에 띄는 곳에서 하는 편이다. 오늘은 우동이 끌린다는 S와 함께 눈앞에 보이는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키오스크 주문이라서 어렵지 않게 그림과 이름을 보고 주문을 했는데, 마지막에 결제하려는데 돈은 안 들어가고 화면이 초기화되었다. 엥? 또 실패인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 좀 전에 열심히 골랐던 S의 우동과 내 치킨 덮밥을 주문하고 아까와 똑같은 화면이 되었다. 포인트 사용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S가 빠르게 ‘No’를 눌렀다. 아까는 내가 Yes를 눌러서 취소된 것 같다고 했다. S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휴, 겨우 주문 완료.
우리가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거의 동시에 음식이 나온다. 우리는 주문하는 걸 보고 있었나 보다며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엄마가 되어서 이런 것도 한 번에 못 하냐는 마음에 자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질책하고 얼굴이 화끈거렸을 텐데 (사실 조금 창피하긴 했다) 괜한 감정의 파도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웃으며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엄마라서 미안해”라고 웃으며 뻔뻔한 말도 할 수 있게 되니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아마 숙소 찾기라는 숙제를 마치고 마음의 여유를 얻은 덕분이기도 했으리라.
3. 그랜드 시네마 선샤인
오늘은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미션인 ‘디지몬 어드벤처’를 보는 날이다. 이케부쿠로에는 토호 시네마와 그랜드 시네마 선샤인이 있었는데 시네마 선샤인의 상영 시간이 우리 일정에 알맞았다. 선샤인 영화관은 우리나라의 CGV 영화관과 비슷했다. 매표소가 있는 4층으로 올라가니 마블즈 영화 홍보물이 가운데를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박서준의 포스터도 따로 걸려있었는데, 특별히 배우 박서준의 팬은 아니지만, 괜히 뿌듯했다.
티켓 예매도 키오스크로 가능해서 더듬거리며 누군가에게 뭘 묻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볼 영화인 ‘디지몬 어드벤처 02 더 비기닝’의 상영시간을 확인하니 제목 뒤에 ‘베스티아’가 붙어 있었다. 그게 뭔지 몰라 검색해 보니 일반 영화관보다 사운드 쪽이 특화된 상영관인 것 같았다. 베스티아관은 관람료가 약간 비쌌는데 베스티아관이 아니면 8시 넘어야 시작하기에 더 빨리 볼 수 있는 베스티아관으로 골랐다. 어른 2200엔, 청소년 1300엔. 우리나라의 청소년 요금은 잘 모르겠는데 이곳은 청소년 요금이 성인의 약 50%로 꽤 저렴하다.
티켓을 사고 남은 시간에 갈 곳은 역시 굿즈샵이다. 일본의 영화관에는 아직도 영화 굿즈가 있다고 해서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매표소 옆쪽으로 넓은 공간에 다양한 굿즈가 전시되어 있었다. L자 파일, 배지, 엽서, 열쇠고리 가챠, 노트 등의 굿즈는 직접 고를 수 있었는데 영화 팸플릿은 계산대 아래에 따로 진열되어 달라고 해야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영화관에서 팸플릿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제작도 안 하는 것 같다. 팸플릿은커녕 작은 포스터나 영화 소개 리플릿도 별로 없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 팸플릿을 제작해 주니 마니아들에게는 엄청난 굿즈가 될 것 같다.
계산대에 가서 팸플릿을 좀 볼 수 있냐고 하니 꺼내어 보여줬는데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영화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영화를 만들게 된 과정 등 두껍지 않으면서도 알찬 내용의 팸플릿이었다. 사지 않는다면 내내 후회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대신 한 부에 만원 정도하는 가격이라 하나만 달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뮤지컬 공연 프로그램 북도 만원 정도면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얇은 팸플릿이 만원이라니, 너무 비싼 거 아닌가? 게다가 디지몬 팸플릿은 표지가 이중으로 만들어져 더 비쌌다. 글씨가 훨씬 많고 알차 보이는 디지몬 팸플릿도 S가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고 하여 함께 달라고 했다.
나는 S에게 디지몬 굿즈를 천천히 골라보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많이 사면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는 지브리의 상품이 진열된 곳으로 갔다. 지브리 굿즈는 이번 영화 말고도 지브리의 인기 작품인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굿즈도 있었다. 모두 사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누르고 엽서와 책받침과 L자 파일을 골랐다.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께 나눠줄 마음에 신이 나서 골랐더니 계산할 때 깜짝 놀랐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왜가리가 그려진 엽서를 여러 장 사고 팸플릿은 하나만 샀는데 나중에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팸플릿이었다. 오히려 S는 나보다 신중했다. 랜덤으로만 살 수 있는 열쇠고리 가챠 몇 개를 골랐다. 굿즈에 정신을 잃은 덕후는 S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혹시나 면세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역시나 면세는 되지 않는다.
4. 베스티아 상영관에서 '디지몬 어드벤처' 보기
굿즈를 소중하게 들고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티켓에는 시네마 5관이라고 나와 있는데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그 층은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팝콘 파는 곳의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그곳의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하고 들어가면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고 했다. 입구에서 직원은 S의 청소년 티켓을 보고 학생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전에 어딘가에서 교통 카드를 살 때 학생증이 있으면 청소년 할인이 된다고 들었는데 어차피 학생증이라는 것이 국내용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그게 증빙이 되나 싶었어 챙기지 않았다. 나는 직원에게 학생증은 없고 여권이 있다며 꺼내 보여주었다.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던 직원은 여권의 생일 날짜를 확인하고는 입장하라고 했다. 안 된다고 하면 성인 표로 다시 사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다.
베스티아관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뭔가 고급스러웠다. 다른 상영관도 똑같은지 모르겠으나, 좀 비싼 곳이니 더 예쁘게 꾸며놨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긴 했다. 보통 멀티 영화관의 작은 상영관들은 한 곳으로 입장한 뒤 이리저리 나뉜 길을 따라가면 똑같은 문이 차례대로 나온다. 그런데 베스티아관은 입구가 따로 있었고 입구 옆에는 벨벳 커튼이 걸려 있었다. 입구 옆 복도에 긴 소파가 놓여 있고 벽에는 오래된 영화 관련 소품과 포스터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조금 특별해 보였다.
상영관 실내는 그리 크지 않았고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개봉한 지 며칠 안 되었는데 이 정도라니, 아무 상관없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약간 의아했다. 디지몬이 뭔지 전혀 모르는 나는 포켓몬도 잘 모르지만 막연하게 그 사촌쯤 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포켓몬의 반응에 비하면 안타까울 만큼 너무 썰렁하다. 나중에 S에게 물었었는데 디지몬 팬들이 들으면 아주 서운한 말이라고 했다. 디지몬은 포켓몬 사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체성을 가졌다나.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본 것은 ‘세미의 어드벤처’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십 년 만에 세미의 어드벤처에서 디지몬 어드벤처로 진화했다고 봐도 되려나. 아들과 함께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에 혼자 감격에 젖어서 보는데 사운드가 나를 놀래켰다. 베스티아 관이라 그런지 입체적 사운드에 디지몬이 진화할 때 깜짝깜짝 놀라면서 봤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어서 내용은 그림을 보며 대충 예측하면서 봤는데 생각보다 철학적이었다. 애들 영화 혹은 오락 영화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질문을 던져주고 있었다. 디지몬이 인간에게 주는 도움이라는 것은 좋은 것인가, 도움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인류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누구에게나 무조건 좋기만 한 일이라는 것이 있을까,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좋은 일이 과연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다. S도 꽤 좋았다고 했다. 뭐 난 잘 모르지만 니가 좋았다니 나도 좋구나.
5. 애니메이트 쇼핑하기
우리가 이케부쿠로에 간 날은 핼러윈데이였다. 하필 여행 일정이 그 무렵이라 시내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복잡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가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코스프레 복장으로 다니기는 했다. 덕후끼리 모여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것인지 우리가 나온 영화관에서 무리 져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영화관 근처에 있는 애니메이트라는 쇼핑몰로 갔다. 덕후들의 천국이라는 이케부쿠로에 왔으니 안 가볼 수 없다. 밖에서 훤하게 보이는 건물 1층으로 들어가자 가챠가 넓게 깔려 있었다. 나는 S에게 어디를 봤는지 길을 잘 기억하면서 돌아보라고 했다. 어느 곳에 들어서면 금방 방향 감각이 없어지는 나에게 해야 할 말이었는데 그것은 노파심이었다. 다행히 나보다 방향 감각이 뛰어난 S는 금방 1층 순회를 끝내고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중요한 것은 위층이라면서.
2층에는 코믹 관련 책들이 모여 있었는데 여느 서점과 비슷했다. 다만 전부 만화책이라는 것이 달랐다. 엄청난 수의 책들은 다양한 분류 기준으로 진열이 되어 있었다. 출판사별로도 구분되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다 그게 그거 같았다. S가 어제 가마쿠라에서 물었던 책을 찾고 있길래 점원에게 묻자고 하니 다른 책들도 둘러볼 겸 직접 찾아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매장이 하도 넓어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점원에게 위치를 물었다. 책의 표지를 보여주니 바로 어디인지 알려주었다. 서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방대한 물량 중에서 어떻게 그렇게 금방 기억해 내는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놀랍다.
S는 어제 찾던 책 말고도 사고 싶은 책이 여럿이었는지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사려고 지나가면 잊어버려서 놓칠 수 있으니 눈에 보이면 바로 장바구니에 담으라고 했다. 하지만 S는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며 장바구니에 책을 담지는 않고 같은 곳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어떤 것을 살지 가늠하는 중이라고 했다. 책이 얼마인지 전체 가격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고르고 있는가 보았다. 돈 때문에 망설이는 것 같아서 나는 S에게 그게 모두 몇 권인지 물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르니 사라고 했다. 가산 탕진 정도가 아니라면 사 줄 수 있다고. 게다가 국내에서 살 수 없는 책도 있다니 그렇다면 반드시 사야지! 밥은 좋은 것으로 못 먹어도 사고 싶은 언제 살 수 있을지 기약하지 못하는 굿즈는 사야 한다. 예전에 아이돌 굿즈 때문에 등골브레이커라는 말이 유행을 했었다. 당시에는 전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던 내가 지금 덕후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백 번 천 번 이해할 수 있게 되다니 삶은 정말 모를 일이다. 대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구매의 정도는 사정과 형편에 따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다행히도 나보다 S는 더 침착하고 더 신중하고 더 의젓했다. 꼭 사고 싶었던 시리즈의 1권은 팔리고 없어서 몇 번이나 망설이던 S는 몇 권의 책을 더 골랐다.
계산대에서 직원은 5천엔 이상이라 가능하다며 텍스 프리를 받겠느냐고 물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면세가 된다니 나보다 S가 더 좋아했다. 계산을 마치고 3층으로 올라갔는데 신나는 음악이 나왔다. 그러면서 3층에 있던 점원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잘 들어보니 방송에서도 곧 폐점이라는 안내와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벌써 9시였다. 남은 위층을 더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아직 우리에겐 이틀이 더 남아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다시 한번 오자면서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