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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18. 2024

둘이서 표가 네 장

_여행 첫날의 헛발질

1. 나무젓가락이 338엔

첫날의 일정은 가마쿠라 근처 후지사와의 숙소에 짐을 두고 에노시마의 석양을 보는 것이었다. 나리타 공항에서 후지사와역까지는 특급열차를 타더라도 두 시간 이상 걸린다. 오전에 기내식을 먹고 오후 2시가 넘었으니 우리는 기차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공항에는 따로 에키벤을 파는 곳이 없다고 해서 편의점으로 갔다. S는 초밥 두 개를, 나는 작은 샐러드를 하나 골랐다. 결제액은 909엔. 앞서 S가 편의점에서 물을 사고 거스름돈으로 동전을 잔뜩 받아왔던 터라 천 엔을 내면 또 91엔의 동전이 생기기에 나는 동전을 줄여 보려고 천 엔 지폐와 십 엔 동전을 냈다. 그리고 101엔을 거슬러 받았다. 서둘러 특급열차의 승강장을 찾고, 바로 기차에 올랐다. 

자리를 찾아 앉자 편의점에서 젓가락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들고 온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내가 넣지 않은 젓가락이 들어 있었다. 편의점 직원의 센스를 칭찬하며 영수증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분명 우리는 초밥 두 개를 샀는데 248엔 초밥이 2점이고 180엔 초밥이 하나 찍혀 있었다. 이상하다. 초밥은 다른 종류로 하나씩 두 개 샀는데, 영수증 상으로는 총 세 개인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잘못된 계산이었다. 게다가 남은 동전을 세어보니 좀 전에 내가 낸 것이 10엔이 아니라 100엔 동전이었다. 그러면 거스름돈은 191엔을 줘야 하는데 101엔만 줬다. 대부분 일본의 영수증에는 내야 할 돈과 내가 낸 돈이 찍히고 그 아래는 거슬러 받아야 하는 돈까지 나온다. 그러니까 영수증에 찍힌 숫자를 잘 보면 제대로 거슬러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 첫날이라 잘 몰랐고 직원이 잘 계산해 줬으리라 믿고서 계산대의 포스기도, 영수증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주는 대로 받은 것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편의점 직원은 우리가 사지도 않은 초밥을 하나 더 찍었고 내가 낸 돈도 1100엔이 아니라 1010엔으로 입력했다. 초밥을 하나 더 찍은 것은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서투른 직원의 실수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나야 남의 나라 돈이니 헷갈릴 수 있지만 자기네 동전을 헷갈리는 건 뭔가 싶기도 하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우리를 무시한 건가 싶어 괘씸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무젓가락 값으로 338엔을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뒤통수 맞은 기분이라 달리는 기차에 앉아서도 내내 찜찜했다. 계산내역을 꼼꼼히 보지 않는 것은 내 탓이었지만, 나무젓가락 센스에 고마웠던 마음은 온 데 간데 없이 실수한 직원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어쩌랴, 기차는 이미 떠났으니. 다음부턴 영수증을 잘 보고 거스름돈을 챙겨야겠다며 구겨지려는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이것은 헛발질의 시작일 뿐이었다.


2. 알면 쉬운데 모르면 어렵다

넥스(나리타 익스프레스) 열차를 타면 가마쿠라까지도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숙소가 있는 후지사와로 가야 했다. 그러려면 나리타 공항에서 넥스를 타고 오후나까지 가서 열차를 갈아타고 후지사와역으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오후나 행 특급열차는 한 시간에 한 대 있는데 예약했던 오후 1시 반쯤 기차는 입국심사가 늦어져서 취소했고 다시 구한 표가 2시 45분이었다. 그보다 앞선 열차로 신주쿠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갈아타다가 헤맬까 무서워 바로 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편하기는 했지만 시간적으로는 큰 손해였다. 물론 다른 열차를 탔다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후나에서 후지사와로 가는 방법으로는 JR라인과 쇼난 모노레일이 있었다. 쇼난 모노레일은 후지사와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에노시마역에 내려서 다시 후지사와로 가는 것이었다. 트렁크를 끌고 열차를 두 번 더 갈아타는 것은 무리일 거 같아서 시간도 절약할 겸 바로 JR로 갈아타고 후지사와역에 내렸다. 빨리 숙소에 짐을 놓고 에노시마로 가서 저녁노을을 보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5시가 넘어서 도착한 후지사와역에는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후지사와역은 선로가 지하가 아닌 지상에 있다. 우리나라의 1호선 중 국철이 선로가 지상에 있어 역의 남부와 북부로 나뉜다. 도쿄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구글맵만 보고 직진했다. 트렁크 가방을 들고 육교 계단을 걸어 내려가 달팽이집처럼 점점 크게 돌다가 선로 너머로 가야 하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여행 후기에서 와이파이 도시락을 사용하면 구글맵으로 길을 찾을 때 종종 방향을 잃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랬다. 그제야 5년 전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구글맵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았던 기억이 났다. 건물과 방향은 보지 않고 손바닥과 땅만 보고 걸으니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나왔던 역사로 도로 들어가 안내원에게 길을 물었다. 남쪽과 북쪽만 제대로 구분했더라면 길은 어렵지 않았다. 알면 쉬운데 모르면 너무나 어렵다는 게 진리다. 겨우 숙소를 찾았는데 이미 길거리는 어두워졌다. 아까 오후나 역에서 쇼난 모노레일을 타고 에노시마역으로 갔더라면, 우리는 해가 지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을까. 정말 멋지다던데. 첫날부터 망했다. 아쉬움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미련이 한가득 남아 이때부터 나의 멘털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욕심이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에노시마로 갔어도 어두워질 시간이었고 노을은 구경도 못한 채 먼 곳에서 숙소를 찾아오느라 더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은 침대에 누워 하루를 돌아볼 때에야 들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직원은 QR코드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냥 여권을 꺼내 주면 된다는 생각을 호텔로 들어오기 전까지 하고 있었는데 직원의 말을 QR코드로 인식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직원의 '빠스포토'라는 발음을 QR코드로 알아들은 것이다. 호텔에서 보낸 메일을 열어도 QR코드는 없었고 나는 더욱 당황했다. 나는 여권을 손에 쥐고서도 자꾸만 가방과 스마트폰을 뒤적거렸는데 내가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옆에서 S가 여권 달라는 것 같다고 몇 번 말하는 걸 들었는데도 내 머릿속은 텅 빈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폰과 씨름하던 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여권을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S의 얼굴을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현실로 돌아왔고 내 행동이 너무 한심했다. 난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안 들을까. 방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엄마가 길 헤매다 멘털이 나갔나 봐. 패스포트를 왜 QR코드라고만 생각했을까?”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서 중얼거렸다.

기운이 쪽 빠진 탓에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첫날이 이렇게 저물어 버리다니. 하지만 이대로 첫날을 보낼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에노시마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있었겠지. 가능하다면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나왔던 분사식당도 가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후 5시까지만 한다는 식당은 진작에 닫았을 것이고 아름답다는 에노시마의 석양도 물 건너갔다. 스치듯 에노시마 전망대의 이벤트 소식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마침 행사 기간이었고 다행히 밤에 하는 이벤트라고 했다. 우리는 늦었지만 밤의 전망대라도 보자며 숙소를 나섰다. 


3. 어둠 속의 에노시마

에노시마까지는 에노덴을 타고 가서 걸어서 섬으로 가거나 버스를 타면 섬 안까지 갈 수도 있었다. 걸어갈 힘은 없어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나는 지도만 보면 멍청이가 돼버렸기에 이번에는 S에게 가는 길을 맡겼다. S가 초등학생일 때는 내가 거의 모든 것을 해야 했지만 (잘했다는 건 아니다) 이제 고등학생인 S는 말도 적당히 알아듣고 (적어도 나보다는 더 많이 알아듣는다) 길도 잘 찾는다. 나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는데 S는 금방 버스 정류장을 찾아냈다. 버스번호를 확인하고 버스가 오는지 고개를 돌려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 오른쪽 방향에서 차가 오고 있었는데 나는 정류장의 왼쪽을 향해 서서 차들의 뒤꽁무니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버스 정류장에 서면 왼쪽에서 버스가 오지만 일본은 도로의 차량 진행 방향이 반대라서 오른쪽에서 버스가 온다. 한참 후에야 그것을 깨닫고는 어이가 없어졌다. 바보가 된 건가.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대단한 실수도 아닌데, 실수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인지 내 영혼은 쪼그라들고 마음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반복되던 일상 속에서는 일어날 리 없는 균열을 만나자 그 타격감은 상당했다.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에노시마로 들어가 버스에서 내리자 식당이 쭉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S의 눈치를 보며 우선 이곳에서 저녁부터 먹을까 물었다. S는 숙소로 가려면 다시 버스를 타야 하니 전망대를 둘러본 뒤에 저녁은 숙소 근처로 돌아가서 먹자고 했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벌써 밤이 되어 가는데 느긋하게 밥을 먹다가 버스라도 끊기면 숙소로 돌아가기가 더 막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섬은 어둠에 잠겨서 풍경도 건물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상점의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사람들을 따라 가자 신사로 가는 길이 나왔다. 양쪽으로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벌써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좁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날은 어둡고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원체 줄 서는 걸 싫어하는지라 나는 무슨 줄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한참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고 마냥 올라야 할 것 같아 피곤이 몰려왔다.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시 내려왔다. 습관대로 하다가 괜한 시간과 체력만 낭비했다. 사람들이 서 있던 줄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가는 대기줄이었고 우리가 올랐던 계단은 걸어 올라가는 길이었다. 뒤늦게 우리도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줄을 섰다. 처음부터 줄을 섰더라면 벌써 올라가 있겠다. 한심. 지금 뭐 하는 거니. S의 보호자로서 잘 챙겨야 하고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헛발질을 할 때마다 나는 나를 괴롭혔다. 

매표소 앞쪽에 안내원은 코팅이 된 안내문을 들고 어떤 표를 살 것인지 물었다. 피곤과 긴장이 겹쳐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글자를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설명을 보니 표는 세 종류였다. 이벤트 세트와 전망대 세트, 에스컬레이터 탑승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전망대에 입장하려면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대충 알아들었다. 우리는 굳이 기다려서 전망대에 갈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벤트 세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카드로 결제하고 두 장의 표를 받아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들어갔다. 터널 양쪽으로 고래, 해파리 등 아름다운 바다 생물들이 춤추는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 길이 나왔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가끔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무슨 이벤트인지, 이벤트 장소가 어디인지 사전 정보는 전혀 없어서 사람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가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이제 내려가는 건가 하는데 S가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또 있었고 직원은 표에 도장을 찍어주며 에스컬레이터 중 마지막이라고 했다. 하마터면 중간에 내려갈 뻔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또 다른 매표소와 입구가 나왔다.

안쪽으로 반짝이는 전망대가 보여서 그 문이 전망대에 가는 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쓰여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두워서 글자도 보이지 않았고 봤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이벤트 입장표만 샀으므로 못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옆 매점에는 즉석으로 구워주는 타코 센베가 있기에 먹으며 한숨 돌렸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우린 이벤트 표를 샀는데 아직 캔들이 있다는 이벤트를 못 봤다. 이벤트 장소가 어디인지 안내원에게 물어나 보자고 했다. 이때 안내원에게 우리의 표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나는 표는 주머니에 넣은 채로 표가 있어야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티켓 발매기를 가리켰다. 우린 우리가 가진 표로 이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1도 하지 못했다. 전망대라고만 생각했으니까. 이왕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한번 들어가 보자고 다시 표를 끊었다. 발매기에서 나이트 입장권을 누르자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사 마을에서처럼 살아있는 기계가 던지듯 표 두 장이 날아왔다. 예쁜 그림이 그려진 티켓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표를 주워 입구로 들어갔다. 이때까지는 해맑게 기분이 좋았다.


4. 둘이서 표가 네 장

에노시마 씨캔들 전망대의 이벤트는 수많은 캔들로 장식된 정원이었다. 입구 안의 정원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밤의 촛불이 사방에 예쁘게 빛나고 있었지만 워낙 지쳐서인지 그다지 신나지는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어딜 찍어도 사람들이 나왔다. 사진 찍기에 흥미가 없는 S와 슬슬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줄 선곳에 이르렀다. 캔들로 둘러싸인 포토존으로 들어가는 줄이었다. 안에는 대여섯 쌍의 사람들만 있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나는 줄을 서 있다가 사진을 찍지 않으려면 의미 없는 일이기에 S에게 “그냥 돌아갈까”하고 물었다. S는 기다린 김에 안에까지 가보자고 했다. 포토존을 지나면 작은 온실과 같은 공간에서 무슨 전시도 한다고 했다.

조금 더 기다렸고,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포토존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대부분 커플들이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앞사람은 뒷사람에게 폰을 맡기고 사진을 부탁했다. 우리 앞에 서 있던 커플도 나에게 폰을 주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우리 차례가 되자 그 커플은 우리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했는데 S는 사진 찍히는 것이 싫다고 했다. 엄마와 함께 온 여행에서 사진 한 장쯤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포토존에서 찍은 사진은 얼굴이 어둡고 캔들의 빛은 담지 못했다. 밤이라서 그런 걸까. 괜히 기다렸다. 배만 더 고파졌다.

전망대 가까이 가자 또다시 올라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망대 입장표를 살 걸. 한 시간 기다려야 한대서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로부터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전망대 입구의 직원에게 우리가 가진 표 네 장을 내밀자 그녀는 전망대는 입장이 마감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표를 가리키며 무슨 말을 덧붙였는데 우리는 전망대 입장표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돌아서 나왔다. 매점은 모두 닫았고 맛있어서 돌아가는 길에 사가려고 했던 타코센베는 사지 못했다.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네 장의 표를 살펴보니 가격이 이상했다. 처음에 구입한 표는 한 명당 700엔, 나중에 입장권은 500엔이었다. 우리가 처음에 산 에스컬레이터 표에는 이벤트 장소로 들어가는 비용이 포함된 것이었고, 전망대에는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쇼난 캔들 이벤트 장소인 코킹 가든에 입장하는 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고 입장권을 또 산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또 화가 뻗쳤다. 처음부터 전망대 입장 포함 표를 샀더라면 입구에서 갈팡질팡하며 시간 버리고 돈 버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처음부터 계단 오르지 않고 줄 서서 표를 샀더라면 타코센베를 샀을 텐데. 오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또 누구 탓할 사람을 찾아 화풀이를 하거나 스스로에게 짜증을 냈을 테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얼른 마음을 비웠다. 엄마가 또 바보짓을 했다며 S에게 이실직고했다. 타코센베 두 개 먹었다고 치자. 속은 쓰리지만 다음에는 더 정신 차리자며 웃었다. 아까 흔들렸던 멘털보다는 약간 단단해진 것 같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늦게까지 영업하는 식당을 구글로 검색했다. 일찍 문을 닫는 상점들이 많아 검색으로는 찾기 어려웠다. 숙소 쪽으로 걸으니 몇몇 문 연 곳이 보였다. 주로 술집이었고 한국음식을 파는 주점도 있었다. 우리는 그 옆의 라멘집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키오스크 기기가 있어 주문할 때 소통의 곤란함은 적을 것 같았다. 각각 맘에 드는 라멘을 골라 주문하고 의기양양하게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직원이 와서 추가로 뭘 또 물었다. 키오스크로 주문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알아들었지만 뭘 고르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주변을 보니 현지인 맛집인지 사람은 많은데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어 메뉴판은 없고 잉글리시, 차이니즈라고 묻길래 잉글리시라고 했더니 영어 메뉴판을 가져왔다(사실 영어도 잘 모르지만 차이니즈보다는 낫겠지). 면의 굵기, 익힌 정도, 맛의 농도 등을 거의 중간으로 고르고서야 주문이 끝났다.

몇 번의 "이랏샤이마세"를 듣고 나자 우리가 주문한 라멘이 나왔다. S의 된장 라멘과 내 소이 라멘. 이곳은 라멘 위에 김을 올려주는 것이 특징인지 모든 라멘에 김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S가 한입 먹고 나서 맛있다고 했다. 그제야 잔뜩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펴졌다. 종일 굶기고 첫 끼로 라멘을 먹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자 S는 맛있으면 됐다며 뭐가 문제냐고 했다. 집에서 새벽 6시도 안 되어 나왔는데 저녁 8시가 넘어 첫 끼라니. 기내식도 먹었고 열차에서 초밥도 먹었지만 그런 것들은 식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무사히 숙소 근처로 왔고, 따뜻한 저녁을 먹었다는 것에 안심하면서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여행 첫날 비행기의 지연 출발부터 시작해 긴 입국심사와 숙소 찾아 길을 헤매느라 노을을 놓치고 마지막에 씨캔들 입장권 두 번 사기까지, 하루가 길었다. 계획한 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계획대로 모노레일을 타겠다고 욕심부리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했고 계획대로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은 무엇일까.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계획대로 되었다고 옳은 것이고 되지 않았다고 그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계획대로 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나만 옳다는 고집이다.

엄마와 함께 다니면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라 그런 일에 이골이 난 듯 크게 짜증을 내지 않던 S에게 무척 고마웠다. 반면 이토록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화가 났다. 예전에 여행 예능 ‘꽃보다 할배’에 나오는 ‘직진 순재’를 보며 ‘사람이 왜 저럴까’ 싶었는데 내가 바로 직진 순재였다. 주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제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앞으로만 간다. 그러니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제는 계획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에 대한 면역이 필요하다. 여태 계획한 대로 살아오지 못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자주 만나지만 여전히 그런 경험은 낯설다. 그리고 결국 누구의 탓으로 돌리거나 화를 내면서 끝냈다. 하지만 여행에서 만나는 일상과 다른 조건과 환경은 내 영혼에 굳은살을 만들어 준다. 예상 밖의 일도,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이제 네 모습을 제대로 보라고 한다. 그대로 받아들임, 내가 생각해 왔던 나와 다른 나는 어딘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다만 변하고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어야겠다. 편의점에서 동전을 잘못 낸 순간부터 시작된 흔들림은 이제 영혼의 굳은살을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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