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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25. 2024

가마쿠라 산책

'바닷마을다이어리'를 따라서

1. 에노덴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이튿날, 우리는 짐을 쌌다. 가마쿠라에서 하루를 묵고 도쿄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에노시마의 노을을 보기 위해 굳이 첫날 숙소를 가마쿠라로 잡았는데 모든 시간이 조금씩 밀리면서 노을은커녕 에노시마의 풍경도 제대로 못 봤다. 하지만 가마쿠라에서 시간이 반나절뿐이라 에노시마에 대한 마음은 일찌감치 접었다. 대신 가마쿠라 산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특히 가마쿠라 여행에서 바닷길을 달리는 작고 소중한 초록색 에노덴 전차는 빼놓을 수 없다. 일찌감치 조식을 먹고 관광객이 몰려들기 전에 에노덴을 타러 갔다.


숙소에서 에노덴 후지사와역은 아주 가까웠는데 뜻밖에도 에노덴 승강장은 2층에 있었다. 지상을 다니는 전차니까 역이 1층에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었다. 2층이니까 당연히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있는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변을 뱅글뱅글 돈 것은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 올라가기 싫다는 마음과 S에게 짐을 들게 하는 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내가 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힘에 부쳐 트렁크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기는 힘들었다. 정작 S와는 상관없이 나 혼자 느끼는 부채감 때문에 오히려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혼자 느끼는 부채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후지사와 역으로 올라가자 마침 열차가 들어왔다. 에노덴은 후지사와 역에서 가마쿠라 역까지 운행한다. 손님들을 모두 내려준 열차는 잠시 대기했다가 방금 들어온 반대 방향으로 출발했다. 에노덴은 초록색 열차로 유명하지만 우리가 탄 차량은 은하철도 999를 떠오르게 하는 짙은 군청색이었다. 에노시마 역에 도착하니 반대 방향에는 초록색 열차가 와 있었다. 양방향의 열차가 모두 서 있는 장면을 사진에 담자 오늘은 왠지 운이 좋을 것 같았다. 시골의 간이역처럼 작고 예쁜 에노시마 역에 내려 코인 라커에 짐을 맡기자 우리는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바닷마을다이어리’의 배경인 가마쿠라고코마에역과 시치리가하마역을 향해 걷기로 했다. 가다가 지치면 다시 에노덴을 타면 된다.


2. 바닷마을다이어리를 따라서

역에서 나와 바로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다. 지도에서 가마쿠라 방향을 찾아 그으로 걸었다. 길을 모르는 것은 어제와 같지만 오늘은 짐도 없고, 걷다가 역이든 바다든 만나도 좋고 못 만나면 그런대로 좋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길을 ‘헤매지 않고 잘’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사라지니 고즈넉한 풍경이 보였다. 가끔 들리는 기차 소리를 제외하면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다.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고 좁은 차로 옆으로는 작은 경계석이 있을 뿐 인도도 따로 없었다.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 이르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신호와 상관없이 차들이 먼저 멈춰 길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된 선로의 나목을 기찻길 옆 사각지대에 보존해 두었고 에노덴이 지나가는 코너에는 에노덴 모찌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마침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이었는지 가게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가게 앞에서 에노덴이 오는 방향으로 대기 중이었다. 덩달아 우리도 멈춰 서서 기차가 오는 것을 지켜봤다. 기찻길은 골목과 접할 때도 있었고 건물들 사이로 숨어버릴 때도 있었다. 집 바로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기분은 어떨까. 아마 그런 곳에서는 위험해서 아이를 키울 수 없겠지. 만약 그래야 한다면 잠시도 긴장을 놓지 못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바다가 보였다. 이날은 우리나라도 이상 고온이 이어져 가을치고 낮 기온이 꽤 높을 때였는데 가마쿠라는 여름처럼 더웠다. 뜨거운 햇살은 바다에 눈이 부시게 윤슬을 만들어냈고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걸었다.


가마쿠라고코마에역은 만화 ‘슬램덩크’ 배경으로 유명하다. 물론 ‘바닷마을다이어리’에도 비슷한 그림 표지가 있는데, 주로 슬램덩크 팬들의 성지로 알려져서 그림과 똑같이 열차가 지나가는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다고 했다. 아침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벌써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필수 버킷리스트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열차가 오길 기다리지 않고 지나쳤다. 대신 기찻길을 따라가지 않고 골목 위로 올라갔다. 더위를 식히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려는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앞이니 작은 상점이라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관광지가 아닌가! 상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뭔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경사진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단독 주택들만이 줄지어 있었다. 이 길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조용했지만 너무 조용해서 탈이었다. 정말로 집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계속 걷다 보면 상점이나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올 것이라는 추측은 완전히 틀렸다. 한참 걷다가 만난 것은 길의 끝이었다. 중간에 다른 갈래 길도 없이 이렇게 긴 길 끝이 막혀 있다니, 좀 놀랐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방금 들어온 길로만 나갈 수 있다. 우리는 뭐 이런 골목이 있느냐고 투덜거리며 뒤돌았다. 실컷 걸은 보람도 없이 아이스크림도 못 먹고 숨만 차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바닷가인 아랫길로 내려가 올려다보니 아까 우리가 걸었던 골목의 집들은 절벽 위에 있었다. 집 사이를 통과해 나오는 길도 없었고 설사 그랬다간 절벽으로 낙하해 기찻길로 떨어진다. 어디쯤 선로 쪽으로 곧장 내려오는 가파른 계단이 있기는 했다. 저 계단은 언제 사용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희한한 길이었다. 이제껏 내가 아는 것 내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구조. 하지만 이때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좁은 시야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열차 지붕을 발아래 지척에서 느끼려나. 바로 보이지만 손 닿지 않는 열차. 가깝지만 먼 그대라고 해야 하나.


3. 어쩌다 마주친 후지산

유명한 관광지라고 생각했는데 바닷가 쪽으로도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이지 않는다. 카페라도 들어가 시원한 음료를 마시자고 하는데 낯익은 카페가 보였다. 만화 ‘바닷마을다이어리’에서 스즈의 언니가 남자 친구와 갔었던 시치리가하마 해변의 카페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래도 반가웠다. 드디어 만화 배경 장소에 온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서 좀 쉬고 싶었다. 입구에 웨이팅 줄이 있기에 가게 건물 뒤쪽을 돌아보고 오니 줄이 없어져 있었다. 줄이 끝났구나 싶어 안으로 들어가는데 종업원이 아주 불친절하게 우리를 막아섰다. 줄이 없다고 생각하고 가게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나는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냥 나가기는 뭣하고 뭐라도 마시고 싶어 음료를 테이크아웃하겠다고 했다. 여러 가지 과일을 섞은 셰이크를 골라 주문하고서도 계속 언짢았다. 주문하지 말고 그냥 나와도 됐을 텐데. 아니다 싶을 땐 바로 나와야 했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문전박대당하고 돈 쓴 것 같아 기분이 점점 나빠졌고 등에서는 열이 났다. 나 혼자가 아니라 S와 함께였기 때문이라 더욱 그랬다. 음료가 비싸서 주문 안 하고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 싫은 것도 있었다. 나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생각되는 남의 시선은 곧 내 안의 시선이다. 잠시라도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자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나는 낯선 곳까지 엄한 눈초리를 달고 왔다. 뭐가 두려워서 스스로의 결정권을 타인의 시선, 그것도 내가 빚어낸 타인의 시선에 넘겨준단 말인가. 나는 늘 그렇듯 바보 같은 내 모습에 화가 났다.


열이 난 몸과 마음을 식히려 셰이크를 들고 바닷가로 갔다. 시원하게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아빠와 함께 파도를 피하며 뛰어다니는 소녀의 가늘고 높은 웃음소리를 들으니 답답하던 마음이 좀 가셨다. 짙푸른 물의 경계를 따라 하얀 파도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는데 우리가 지나온 방향으로 에노시마가 보였다. 섬 오른쪽 하늘에 커다란 물체가 눈에 띄었다. 하얗고 뾰족한, 구름치고는 비현실적으로 너무 선명했다. 누가 흰 유화물감으로 하늘색 캔버스에 그려 넣은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그쪽을 가리켰다.


-저거 구름이지?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런데 구름이 왜 저렇게 보이지?

-어? 설마 저게 후지산?


멀리 보이는 것은 후지산이었다. 중간쯤 절묘한 위치를 구름이 길게 가리고 있어서 구름 위로 보이는 봉우리도 구름처럼 보였다. 구름 아래는 흐릿한 파란색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하늘처럼 보였다. 날씨가 좋으면 에노시마에서도 후지산이 보인다는 얘기는 들었었다. 그런데 기대도 안 했는데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꽤 먼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괜스레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 렌즈로 후지산을 당겨보았다. 눈앞에 생생한 후지산이, 손으로 찍어 먹어도 될 만큼 생생한 얼음산이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정상에는 눈이 없어서 아쉬워했었는데 며칠 사이 눈이 왔는지 봉우리 근처에 눈이 쌓여 있었다. 내일 후지산을 보러 갈 예정인데, 내일도 오늘만큼 날이 좋았으면 좋겠다며 우리는 신이 났다. 좀 전의 언짢음은 쨍하니 빛나는 후지산의 모습에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다시 힘을 얻어 가마쿠라를 향해 걸었다.


4. 시치리가하마역에서

에노덴 시치리가하마역은 해변에서 멀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아이스크림 가게는 역 바로 앞에 있었는데 영업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역은 정말 작았다. 입구에는 티켓을 터치하는 기계만 두 개 있었는데 지키는 사람도 없고 출입을 막는 개찰구도 없었다. 입구 옆에 사무실 창문으로 화장실을 물으니 직원이 직접 나와 승강장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기차가 들어올 때면 너무 가까워 위태로울 만큼 선로 바로 옆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나무로 만든 작고 하얀 집. 강한 바람이 불면 오즈의 마법사 영화에서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화장실은 딱 있어야 할 것만 있는 담백하고 청결한 공간이었다. 마침 내가 들어가 있는 동안 열차가 들어왔다. 나는 화장실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집이 날아가버릴까 무섭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재미있었다. 그때 바깥의 세계는 오즈만큼이나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치리가하마역을 떠올리면 이 하얀 작은 집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가마쿠라 역까지는 몇 정류장 되지 않았다. 중간에 ‘바닷마을다이어리’의 스즈네 집이 있던 고쿠라쿠지역도 궁금하고 대불이 있다는 하세역도 지나는데 시간이 없어 우리는 가마쿠라 역까지 바로 갔다. 역에 내리자 신도림 전철역에서 맡던 만쥬 냄새가 진동했다. 판다 모양의 만쥬는 무려 여섯 가지 맛이라고 했다. 하지만 S는 안전하게 팥으로 하겠다고 했다. 만쥬는 원래 슈크림이 진리인데, S는 슈크림을 싫어한다. 만쥬를 우물거리며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가자 마치도오리의 다양한 상점들이 나왔다. S에게 오래된 서점에 한번 들어가 보겠냐고 물었더니 선뜻 그러자고 했다. 평소 책과 별로 안 친한 S가 웬일인가 했는데 S는 뭔가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사고 싶은 책이 있다고 나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는데 저 나름 계획이 있었나 보다. S가 찾는다는 책이 있는지 물었더니 직원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라서 그런가. 책표지 사진을 보여주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아쉽게도 찾는 책이 그곳에 없어서 나는 여행 중 해야 할 일 목록에 서점을 포함시켰다. 뭐가 됐든 책을 사고 싶다니 엄마의 마음은 괜히 기쁘다.


만쥬를 다 먹고 이번에는 당고를 먹으며 걸었다. 한 꼬치에 네 개가 꽂혀 있는데 S는 하나 맛보더니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입맛에 맞지 않던가 보다. 한참 더 걸어 큰길로 나오자 츠루가오카 하치만궁의 입구가 보였다. 넓은 입구 앞에는 커다란 찻길이 지나고 사람도 많았다. 전통 의상을 입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늙은 노인까지.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우리는 신사에서 사제나 스님들의 의식을 지켜보는 것 외에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일본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장소겠지만 나에게는 스즈가  남자친구인 후타와 함께 갔었던 곳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었으니까.(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츠루가오카 하치만궁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었다. 쿨럭@.@)


5. 가마쿠라 하토사브레

다음 할 일은 하토사브레였다. 사실 그것이 가마쿠라 역에 온 이유의 절반 이상일 것이다. 가마쿠라 하치만궁을 관광지로 봤을 때 특별히 추천할 만한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는 특별한 선물을 사기 위해 꼭 들러야 할 곳이었다. 그것은 가마쿠라의 비둘기 모양 과자 하토사브레인데, 가마쿠라에 있는 본점에서만 살 수 있다고 했다. 여행선물은 주로 공항 면세점에서 사는데 많이들 산다는 도쿄 바나나와 그 외의 것들도 대부분 공항 면세점에서 구할 수 있다. 얼마 전 홋카이도에 다녀온 지인이 홋카이도 특산물인 감자로 만든 과자 오미야게를 보내주셨는데, 역시 공항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본점에서만 살 수 있다는 말에 또 혹해서는 거기에 꽂힌 것이다. 여행 초반에 선물을 사서 들고 다니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지만, 특별한 선물을 위해 우리는 (정확히 말해 선물에 진심인 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궁의 입구에서 난 큰길을 따라 직진하면 찾을 수 있었다. 상점 근처로 가자 하얀 비둘기가 그려진 노란색 종이가방을 든 사람이 많았다. 상점 안에는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있었다. 궁에 소풍을 왔다가 기념품을 사러 온 것 같았다. 비둘기 모양 과자 외에도 작은 기념품이 많았다. 그중에 옷 갈아입히는 비둘기 무사 인형을 다섯 살 조카 선물로 골랐다. 기념품은 직접 여행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크게 의미 없을 테다. 다만 시간이 흐른 후에 혹시 아주 작은 추억이나마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물건에 담긴다. 하지만 선물이라는 것은 결국 주는 사람의 행복한 순간으로 소모될 뿐이다. 받는 사람의 기쁨이라든가 기분이라든가 하는 것은 주는 사람의 몫이 아닌 것이다.


과자가 여러 상자 든 커다랗고 노란 봉투를 들고 다시 가마쿠라 역으로 갔다. 어느새 점심이었지만 만쥬와 당고 등 주전부리를 해서 배가 많이 고프지는 않았기에 곧바로 에노시마로 가는 에노덴을 탔다. 햇빛이 뜨거워 반소매를 입고도 땀을 많이 흘린 S는 걷느라 많이 지쳤는지 열차에 앉자 잠이 들었다. 나는 창밖에서 반짝이는 바다를 영상으로 담았다. 바닷가로 한참 달리던 기차는 집들 사이로도 지나갔는데 집 건물의 뒷문과 바로 붙어 있는 집도 있었다. 그런 집에 살면 기차는 삶의 일부가 될 것 같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뿜어내는 빛과 열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열차의 속도에 따른 위험으로부터도. 어쩌면 역설적으로 거기 사는 일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기찻길을 둘러싼 소박한 골목들을 더 오래 구석구석 돌아보고 싶어졌다.


6. 짜고 밍밍한 시라스동

에노시마역에 내려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가마쿠라에 온 이유가 ‘바닷마을다이어리’ 때문이었으니 거기 나온 시라스동을 먹어봐야지. 시라스라는 잔멸치가 가마쿠라의 특산물이라고 만화에서 본 것 같다. 특별히 전문점이 아니라도 거의 모든 가게에서 시라스동을 팔았다. 우리나라 관광지에 있는 식당에서 삼겹살과 비빔밥과 떡볶이를 같이 판다더니 그런 식인가. 아직 낮이라 영업 전인 곳도 많아서 우리는 문을 연 작은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메뉴는 국수 두세 종류와 시라스동, 그리고 교자뿐이었다. S는 라멘을, 나는 시라스동을 시켰다. 시라스동은 사이드메뉴처럼 작은 사이즈라서 1인 메뉴로 시키면 추가로 200엔을 더 내야 한다고 했다. 교자를 함께 시키면 추가요금이 없다길래 교자도 하나 주문했다.


궁금했던 시라스동이 나왔다. 투명한 잔멸치는 국수처럼 자기들끼리 엉켜서 밥 위에 얹혀 있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멸치를 익혀서 먹는 게 아니었어? 밥과 함께 먹기 전에 멸치만 먼저 먹어 봤는데 예상대로 약간 미끌거리는 식감이었다. 회를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회의 느낌은 아니었다. 멸치는 바다에 있던 그대로인 듯 짭조름했다. 아주 짜지는 않아서 밥 위에 간장을 약간 뿌렸는데 멸치 아래 깔린 밥에 이미 간장이 뿌려져 있었다. S는 시라스동을 한입 맛만 봤고 내가 한 그릇을 겨우 다 먹었다. 호불호가 갈릴 법한데 자극적이지 않은 자연의 맛이어서 그럴 수 있다. 내 기준으로는 한 번만 먹어보면 되는 맛이랄까. 그래도 첫 입에서 느껴진 부드러운 멸치의 맛은 꽤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주로 잔멸치를 볶아서 먹는데 그러면 멸치가 딱딱하게 씹힌다. 그런데 시라스동의 멸치는 부드럽다. 간이 있지만 아주 짜지는 않았고 그래서 밍밍했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다니던 멸치를 막 건져내면 바로 이런 맛일까.


7. 쇼난 모노레일을 타고

점심을 먹고 코인라커에 넣어 두었던 짐을 찾아 쇼난 모노레일을 타러 갔다. 모노레일의 에노시마역은 에노덴 역에서 찻길만 건너면 있었다. 모노레일이라 그런지 이곳도 승차장이 위층에 있었는데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입구에 자동발매기를 보고 우리는 표를 사야 한다는 생각에 현금으로 표를 샀다. 오후나까지 320엔. 둘이 640엔을 동전으로는 모자라 지폐를 넣고 또 한 움큼 동전을 받았다. 작은 직사각형의 표를 개찰구의 구멍에 넣고 기계를 통과해 나오는 표를 뽑아 들어갔다. 표에는 동그랗게 작은 펀치 구멍이 나 있었다. 우리의 옛날 지하철 개찰구 같았다. 자리에 앉은 뒤 S가 모노레일도 교통카드로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우리에겐 교통카드가 있었지. 에노덴은 카드로 탔으면서 모노레일에서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동전 줄이려는 생각만 했지 카드 사용하려는 생각은 안 했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표를 넣고 빼는 아날로그 감성을 여기 아니면 어디서 느껴보겠냐며 웃었다. 바보 같은 짓을 매일 하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도 같다. 기본값이 그 수준에 맞춰지면 화낼 일이 없겠다 싶다. 하지만 이 표를 만지며 느끼는 아날로그 감성은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뿐이다. 나갈 때는 기계가 표를 먹고 돌려주지 않았다.


쇼난 모노레일은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하늘 위 선로에 매달려가니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었다. 건물보다 아주 높게 가는 것은 아니라서 건물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모노레일을 탔다면 해지는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끌탕을 했는데 오늘 타보니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냥 빠르게 가는 열차일 뿐이었고 하늘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양한 종류의 열차를 타려는 목적으로는 괜찮은 경험이었다. 교통카드로 탈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자.


‘바닷마을다이어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보다 먼저 만화를 봤고, 만화가 완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봤다. 그리고 얼마 전 완결된 만화를 다시 봤다. 그림도 좋고 이야기도 좋아서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만나 집으로 데려왔는데 그때는 완결되기 전이었다. 최근 우연히 만화 생각이 떠올라서 나머지 편을 틈날 때마다 중고서점에서 찾아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보게 된 만화 때문에 이번 여행 일정에 가마쿠라가 포함되었다. 예전에 사두고 다 못 읽은 오가와 이토의 소설 『츠바키 문구점』에도 가마쿠라 지도가 그려져 있다(여행 오기 전 모두 읽으려고 했는데 짬이 나지 않아 결국 못 읽었다;).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영화 평론가 이동진 님이 소개했던 검은 모래의 가마쿠라 해변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로 여행이 가능해졌다. 이런 걸 시절인연이라고 하나보다. 꿈만 꾸다 잊고 있던 가마쿠라를 산책하게 되다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듯 사람들이 다니는 유명지만 찾아다니는 일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지쳐가는 일일 뿐이다. 이제는 유튜브든 TV  프로그램이든 영상으로 얼마든지 세계 곳곳을 볼 수 있는 시대다. 유명한 곳만 돌아다닐 것이라면 굳이 현장에 찾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 외에 우리는 여행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까? 의미를 담지 못한다면 풍경은 한낱 복사본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여행에서 낯선 곳을 돌아다니고, 새로운 것을 보고, 사진을 찍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게 될까? 풍경 안에 사람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 여행을 내가 그리워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이든, 만화 속 인물이든. 실제 여행에서 만난 사람이든,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서의 사람이 함께 할 때라야 박제된 사진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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