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번째 삶 Feb 08. 2024

후지산 관광 1

후지산 급행열차와 에키벤

1. 조식과 코피


여행 셋째 날, 후지산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전날 가마쿠라 해변에서 예상치 못하게 쨍한 후지산을 보고 감명받았던 터라 매우 기대가 컸다. 하지만 여행 한 달 전에 예보에서 봤던 대로 아침부터 날은 잔뜩 흐려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일정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벌써 3일 차이고  오늘이 아니면 이번 여행에 후지산을 보러 갈 시간은 없었다. 날이 어떻든 상관없이 우리는 신주쿠 역으로 가야 했다. 우리가 가는 동안 혹시나 날이 개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예정대로 움직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젯밤 영화를 보고 애니매이트를 쇼핑하느라 늦게 숙소에 돌아왔다. 그래도 많이 늦은 편은 아니라서 일어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일어나 씻고 7시경에 호텔의 조식을 먹으러 갔다. 호텔 조식은 전날 숙소에 비하면 종류도 아주 적었고 입맛을 당기는 메뉴도 별로 없었다. 소소한 반찬들과 미소된장국에 흰밥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이라면 금방 튀겨낸 감자튀김 정도. 그래도 하루 일정을 소화하려면 밥은 먹어야 하니까, 든든히 먹자며 접시에 각자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내 앞의 접시만 보며 몇 번 젓가락질을 하지 않았는데 마주 앉은 S의 접시에 붉은 동그라미가 툭하고 그려졌다. S의 코피가 터진 것이었다. S의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나는 계속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다. 엊그제 비행기에서 내린 뒤로 S는 계속 귀가 먹먹하다고 했었다. 나는 단순히 비행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꽤 오래간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 조치도 할 게 없었다. 하품을 하고 입을 크게 벌려 봐도, 코를 잡고 킁 하고 불어 봐도, 어떻게 해도 귀가 뚫리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하게만 여길 뿐이었다. 당장 앞에 놓인 여행 일정을 해치우기에 바빠서 S의 체력까지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그러다 여행 3일째 아침에 코피가 터져버린 것이다. 

한참을 휴지로 닦고 미간의 코 뿌리를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잡고 세게 눌러도 코피는 멎을 생각을 안 했다. 휴지를 작게 말아 콧구멍을 틀어막으면 금방 휴지는 피에 젖었다. 결국 S가 프런트 옆 화장실로 가서 혼자 수습을 하고서야 코피는 멎었다.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던 나는 그런데도 일정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여행에서 소화해야 할 일정에 비해 코피 정도는 소소한 에피소드일 뿐 아무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밥 먹던 자리로 돌아와 남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정리하고 나서 신주쿠로 출발했다.


2. 선물꾸러미의 부피

이번 여행에서 또 하나 특별했던 점은 지인을 위한 선물이었다. 지인은 공동체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학인으로 도쿄에 살고 있다. 매주 일본어 강독을 함께하고 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고 특별히 친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는 장소에 가까이 계신다면 한 번쯤 만나서 인사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는 부담이 되는 제안일 수도 있어서 말하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여행 계획이 알려졌다. 학인 선생님은 숙소가 어디냐고 물으면서 시간 되면 얼굴 보자고 먼저 흔쾌히 제안해 주셨다. 나는 기쁘게 응하면서도 괜한 약속을 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 반가운 만남이니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내 생활의 습관 같은 것이었는데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면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왔다. 나는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를 만남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골랐다. 도쿄에 사는 선생님께 어떤 것이 좋을지,  내가 귀한 것을 선물할 주제는 못 되기에 재미난 선물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요즘은 약과가 핫하여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있다고 했다. 약과라 하면 과거 제사를 자주 지내던 시절에는 집 안에 굴러다녀도 쳐다보지 않던 간식이 아닌가. 그런데 그게 요즘 귀한 디저트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줄을 서서 사야 한다는 고급 약과는 냉장이나 냉동 보관을 해야 해서 여행 일정상 가져가기 어려웠다. 대신 선물용 일반 약과를 한 세트 샀다. 그걸로는 왠지 부족해 보여서 여행 커뮤니티의 글을 검색하다가 일본 친구들이 좋아했다는 누룽지를 알게 되었다. 누룽지도 예전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의 간식 아닌가. 옛날 사람처럼 그런 걸 선물이라고 들고 가나 싶기도 했지만 반대로 재미있는 선물이 될 것도 같았다. 누룽지는 일반 누룽지와 김치볶음밥 맛의 누룽지가 있었다.

1회분씩 포장된 누룽지 두 박스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여행 전전날이었지만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다음 날이면 도착하는 시대라서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물건이 도착하는 날짜가 아니라 부피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빈번한 여행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짐은 적을수록 좋다는 원칙이었다. 그래서 S와 내 짐을 최대한 간단히 쌌는데 선물이 이렇게 크다니. 나는 배달된 누룽지의 놀라운 크기 앞에서 간단히 약과만 한 상자 넣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옆에서 남편은 기왕 샀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팔랑귀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이 선물이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니 한번 웃겨드리자는 생각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나는 트렁크에 자리를 비워 커다란 선물 세 상자를 넣었다.


여행 3일째, 여태 들고 다니던 그 선물을 드디어 전할 수 있는 날이다. 선생님과는 후지산에 갔다가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밖에서 만나야 하니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선물을 들고나가야 했다. 트렁크에 넓게 자리하여 힘들게 들고 왔으니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결의가 나도 모르게 솟았다. 집에서 챙겨 온 종이 가방에 선물을 넣어 어깨에 메고 이케부쿠로 역으로 갔다. 신주쿠 역까지는 한 정거장. 아침 출근 시간이라 열차에는 사람이 많았기에 큰 가방이 부담스러웠다. 또 한 번 한숨.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힘들게 들고 다니는 것일까. 내 행동의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잠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큰 종이 가방을 들고 후지산까지 갈 수는 없으니 신주쿠 역에 내려 코인 라커에 보관했다. 아무 데나 넣었다가 복잡한 역 안에서 짐 맡긴 라커를 찾지 못할까 봐 나는 신중하게 우리가 탈 열차 승강장 주변의 라커에 넣고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짐을 넣고 결제한 영수증을 보자마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전날 에노시마에서는 동전으로 보관료를 지불해서 영수증에 라커 문을 열 수 있는 인증번호가 나왔었다. 이날은 하필 현금이 아니라 스이카 카드로 지불했는데 영수증을 보니 인증 번호가 아니라 결제한 카드가 있어야만 라커를 열 수 있었다. 현금으로 지불했다면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선생님이 인증번호로 직접 라커를 열고 찾아가실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짧은 순간의 선택은 우리의 저녁을 아주 복잡하게 꼬아버렸다.


3. 에키벤을 찾아서

아이들이 어릴 때는 토마스 기차를 좋아해서 다양한 기차를 타보려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강원도 정선으로 풍경 열차를, 곡성으로 증기기관차를 타러 가고, 별 일도 없이 KTX를 타고 천안에 가기도 했다. 그 시절로부터 한참 멀리 왔지만 그래도 경험은 소중하니까, 이번 여행에서도 여러 종류의 기차를 타보려고 했다. 이번에는 거기에 숨겨진 욕심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바로 에키벤이었다. 일본의 기차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키벤이라고 했다. 우리는 공항을 오갈 때 말고는 에키벤을 먹을 수 있는 기차를 탈 일이 없었으므로 후지산으로 갈 때 에키벤을 사자고 했다. 갑자기 코피가 나는 바람에 아침을 대충 먹었으니 점심은 고급진 에키벤으로 먹자! 

나는 든든한 밥을 준비해야 한다는 되지도 않는 엄마의 책임감으로 의지가 불끈 일어났다. 나는 라커에 짐을 넣은 뒤 우선 주변에 에키벤을 파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검색을 해 보니 분명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다 이리저리 가 봐도 작은 카페 하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출구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역 안은 온갖 환승과 출구로 복잡해도 역 바깥으로 나가면 상점이나 가게들이 보이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오판이었다.

아무 출구를 하나 택하고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라커가 있는 곳으로부터 출구까지는 매우 길었다. 중간에 편의점 하나와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었다. 통로에 공사 중인 구간도 있어서 한참 더 가니 출구가 나왔다. 호기롭게 표를 내고 개찰구를 나왔으나 주변에는 공사장과 넓은 도로와 높은 건물들뿐이었다. 그것도 1층에 상가가 없는 건물이었다. 역 주변이니까 상점 비슷한 뭐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당황했다. 촌놈이 서울에 처음 가서 사방에 높은 빌딩을 보고 느끼는 놀라움과 황당함이 이런 것일까.

또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더니 여태 묵묵히 따라오던 S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 너무 힘들다…….” 나는 또 내 생각만 하고 직진했구나 싶어 다시 역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와이드패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요금을 더 지불할 뻔했다. 역으로 들어가 아까 지나왔던 편의점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샀다. 오늘도 편의점이라니. 벌써 3일째인데 아직도 편의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좀 전에 멋있는 에키벤을 사야겠다고 불태우던 의지가 무색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의 무능에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다. 신주쿠 역에 도착한 지 삼십 분 이상을 어디 앉지도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나는 S의 눈치를 보며 에키벤을 포기하고 열차 타는 곳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후지카이유가 표시된 홈 번호도 다른 것이 있어서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글자를 하나하나 살펴 홈을 찾았다. 제대로 고른 홈으로 올라갔더니 바로 눈앞에 에키벤 파는 곳이 보였다. 후지산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승강장에 에키벤 가게가 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머리에 피가 도는 것처럼 생각이 돌아갔다. 에키벤이 왜 에키벤인데. 역 안에 있어야 할 에키벤을 왜 역 바깥을 헤매며 찾았던 것이냐. 나의 멍청함을 확인하면서 아침부터 힘들었던 S를 더 지치게 했다. 나는 S에게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고르라고 했지만 S는 더는 기운이 없는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난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자괴감에 빠져서 S가 좋아하는 새우튀김이 있는 에키벤을 골랐다.


4. 2호차는 반대쪽에

드디어 로망인 에키벤도 샀고, 이제 기차에 제대로 오르기만 하면 한숨 돌릴 수 있다. 출발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대기승객을 위한 휴게실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좌석은 만석이었다. 앉을 곳이 없어서 그냥 우리가 기차에 오를 번호 쪽으로 움직였다. 아직 승강장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바닥에는 정차할 차량의 번호가 쓰여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기에 걸으며 바닥을 보는데 우리가 탈 2호차가 나오기 전에 승강장이 끝났다. 우리는 당황하며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쓰인 번호는 여러 개였는데 열차에 따라 번호가 다른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니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가와구치코 방면 열차 2호라고 쓰인 팻말을 찾아 그 아래에 가서 섰다.

한 무리의 여성들이 우리처럼 바닥에 쓰인 번호를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래쪽은 짧게 치고 위쪽만 길러서 묶은 투 블록 포니테일의 핫한 헤어스타일을 한 여자가 나에게 와서 너도 3호차냐고 영어로 물었다. 나는 2호차라고 했고 그들은 내 오른쪽, 열차 승강장의 맨 끝 쪽으로 가서 섰다. 잠시 후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오자 그들은 그에게 열차 위치를 묻는 것 같았다. 안내원의 답을 들은 투 블록 포니테일의 일행은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나에게 왼쪽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가 맞다고 확신하는 표정으로 머리 위쪽의 안내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그래, 뭐 네 뜻이 그렇다면 알아서 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일행들과 왼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우리가 서 있던 왼쪽에서 기차가 들어왔다. 우리는 바로 앞의 열차칸에 올랐고 자리 번호를 확인하고 앉았다. 다만 실내에 차량 호수가 11이라고 쓰여 있어서 살짝 신경 쓰였지만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승무원이 다가와 표를 보여 달라고 했다. 내가 의기양양하게 꺼낸 표를 본 승무원은 이 차량이 아니라고 했다. 이곳은 11호이며 왼쪽 방향으로 가야 2호라고 했다. 우리는 완전히 반대쪽에 탄 것이었다. 기차 방향은 오른쪽인데, 기차 후미가 1호였던 것이다. 기차가 들어온 방향으로 보아도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앞쪽인데. 우리나라의 지하철을 매일 타듯 하지만 탈 때 차량 호수가 왼쪽이 적은 지 오른쪽이 적은 지 주의 깊게 본 적이 없다. 차량 번호를 찾으려면 늘 바닥에 쓰인 번호를 보면서 움직였지만 적어도 차가 달리는 방향의 앞쪽의 차량 번호가 적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바닥에 쓰인 번호와 다르고 기차 진행 방향과도 반대인 차량의 나열 번호라니. 사람들이 차량 번호를 어떤 기준으로 보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고정관념과의 싸움이랄까.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

우리는 기차가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차 한 량의 길이도 상당했는데 무려 아홉 량을 좁은 복도로 그것도 기차 진행 방향의 반대로 속도에 저항하며 걸어가야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3호차에 들어서자 아까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던 여자가 맨 앞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날 보더니 씩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 약간 흔들었다. 나는 민망하여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녀가 가자고 할 때 함께 갔더라면 이 고생은 안 해도 됐으련만. 겨우 자리를 찾아 앉고는 아까 찍어 둔 팻말 사진을 열어 보았다. 내가 본 가와구치코행 2호차 옆에 급행 리미티드 익스프레스 11호차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정보만 봤고 그 옆의 안내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더구나 내 생각이 옳으므로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말도 듣지 않았다. 왜 나는 안내원에게 다시 확인하지 않았을까? 내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명리상 내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던 얘기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S는 아침 코피부터 시작해서 신주쿠 역에서 에키벤을 찾는 헛걸음, 그리고 달리는 기차의 끝에서 끝까지 걷는 등으로 아주 지쳐 보였다. 여행 3일 차에 고비가 왔다. 여행 첫날부터 나아지지 않았던 이명 현상과 제대로 쉬지 못해 쌓인 피로가 겹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감기 기운이 계속되어서 코는 거의 막혀 있다고 했다. S도 특별히 나에게 자신의 불편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도 일정에 신경 쓰다 보면 S의 상황은 금방 잊어버리고 직진만 했다. 나는 오늘 아침의 일만 해도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아마 S는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으리라. S가 나 때문에 화난 마음을 내게 풀었다면 우리는 싸웠을까. 또다시 일방적으로 내가 S에게 쓴소리를 퍼부었을까. 

이번에야말로 둘이서 여행하며 크게 싸우든 화내든 할 일이었는데도 우리는 조용히 각자의 분노를 삭였다. 그것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로를 배려하다 보니 서로의 눈치만 보게 된 결과이기도 했다. 가족 간의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한다면 곧 어른이 되어 부모를 떠나는 아이들과는 영영 감정을 나누지 못하는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열차 안에는 아침을 먹는 사람들의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는 지쳐서 에키벤을 먹을 기운도 없었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에키벤을 먹었다. 일련의 고생 때문인지 크게 맛있다거나 하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그토록 원했나, 나는 무엇을 찾으러 이런 여행을 계속하고 있나, 이런 생각들이 입 안에 든 음식을 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차창 밖의 하늘은 흐려있었다. 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구름이 걷히길 기대했지만 회색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후지산이 보인다는 방향으로 좌석을 예매했지만 구름 낀 하늘만 실컷 봤다. 이럴 때 후지산이라도 구름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더라면 오전의 피로가 모두 풀릴 것 같았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이전 06화 이케부쿠로에서 덕질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