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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Feb 22. 2024

여행과 선물

여행 마지막 날

1. 선물의 무게

여행 마지막날의 일정은 숙소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 공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어제 만나기로 했던 지인 선생님께 톡을 보냈다. 아침에 혹시 짬이 나거든 만나러 오시겠다고 했었다. 나는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숙소에 맡겨놓고 체크아웃할 생각이었는데 톡을 보내자마자 지금 이케부쿠로 역 앞 카페에 와 있다는 답이 왔다. 시간을 보니 씻고 조식을 먹을 시간도 빠듯했다. 그래도 아침부터 서둘러 나를 만나러 와 계시다니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숙소를 알려준 뒤 씻고 내려가니 선생님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비로소 안심. 여행 전 짐을 쌀 때부터 망설였던 이 커다란 선물 보따리가 드디어 주인에게 갈 수 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진지한가 말이다.

내 어깨에 짊어진 가방 크기를 본 선생님은 웃음을 빵 터뜨렸다. 이걸 여기까지 가져왔다고? 하는 표정이었다. 약과 한 상자와 누룽지 두 상자. 무게보다도 부피가 압도적이다.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걸 들고 일하러 가야 할 선생님을 생각하니 무척 민망해졌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구나. 내가 어려운 생각만 했지 선물 받는 당사자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짧은 생각이 선생님께도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생각대로, 의도한 의미와는 다르다고 해도 어쨌든 선생님을 한번 웃게 해 드렸으니 되었다.

일 년 가까이 온라인으로 얼굴만 보던 우리가 현실로 튀어나와 만나게 된 것만으로 감격이다. 우선 우리는 한번 안아보자며 서로 얼싸안았다. 이렇게 키가 컸었냐며, 화면 속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과 실물을 매칭시키느라 바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두서없이 후지산 못 본 이야기 등 하소연을 했는데 곧 조식 마감 시간이라 바로 들어가야 했다. 겨우 10분 남짓의 조우를 위해 달려온 선생님께 무척 감사하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를 만나러 아침 일찍 달려와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선생님은 선물이라며 작은 가방을 내밀었다. 또 미안한 마음. 내 속 빈 강정 선물꾸러미 때문에 선생님께 여러 번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가볍게 생각해 왔던 사람 사이의 선물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운 문제였던가.


2. 선샤인 시티

아침을 간단히 먹고 숙소 근처의 복합 공간인 선샤인 시티로 나섰다. 길도 모르면서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아주 가깝다고 장담했는데 길 찾기는 만만치 않았다. 큰 도로 쪽으로 나가도 보이지 않기에 주변에 길을 물어볼 사람을 찾아보았다. 한 젊은이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머리는 금발에 숄더백을 크로스로 짧게 메고 청바지를 헐렁하게 입은 힙한 차림의 여성이었다. 나는 다가가서 선샤인 시티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녀는 뭐라고 설명을 하며 손으로 이리저리 방향을 가리키다가 내 표정이 못 미더웠는지 함께 가자고 했다. 자기도 그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자 그녀는 앞장서서 걸으면서 한국 사람이냐고 우리말로 물었다. 내가 놀라자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다고 했다. 길을 건너자 큰 건물 뒤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나와 S가 어리둥절 하자 그녀는 웃으며 빠른 길이라고, 이상한 데가 아니라고 했다. 뒷골목을 빠져나가자 바로 사방에 여러 건물이 있는 번화한 길이 나왔다. 길에 인접한 몇몇 건물에 무슨무슨 학교라고 쓰여 있었다. 학교는 울타리 안에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다니는 길 주변에 여러 건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테두리가 없는 학교에서는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을까. 금발의 그녀는 길 건너를 가리키며 거기가 선샤인 시티라고 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우리는 길을 건너 선샤인 시티로 들어갔다.


선샤인시티에는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 많다고 했다.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우선 건물의 지도부터 살폈다. 각종 캐릭터샵이 있었고 지브리샵도 있었다. S가 좋아하는 디지몬 관련 캐릭터샵은 따로 없었지만 포켓몬 매장은 여러 개 있었다. 가챠샵부터 가보려고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동안 짱구니 키티니 하는 캐릭터샵이 층마다 보였다. 3층에 내리자 가챠샵이 어디 있는지 찾을 필요도 없이 엄청난 크기의 공간에 가챠 기계가 줄을 서 있었다. 종류도 엄청나서 잠시만 정신을 놓았다간 가산 탕진하기 십상이라 나는 S에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일렀다.

사실 탕진할 현금이 얼마 없었기에 지갑에서 천 엔 지폐를 두 장 꺼내어 100엔 동전으로 바꿔 S에게 건넸다. 가챠 하나에 300~400엔이라서 그래 봐야 네다섯 개를 할 수 있다. 나는 공간을 관리하는 직원이 지나가기에 혹시 디지몬 관련 가챠는 없는지 물었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친절하고 길게 설명을 해줬는데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행히 S는 알아들었는데 그럴 줄 예상하고 있었단다. 디지몬은 생각보다 마니아층이 적은 모양이었다. 나는 디지몬이면 포켓몬 비슷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S는 덕후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속상하다고 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게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묻지만 덕후들에게는 너무나 다른 대상인 것이다. 덕후의 마음은 덕후가 안다.

S는 디지몬은 없지만 그 외에 좋아하는 캐릭터 가챠를 신중하게 골랐다. 맨 처음에 원하는 게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기뻐하거나 크게 속상한 티를 내지 않는 S지만 첫 번째로 뽑은 가챠가 자기가 1순위로 원했던 것이 나오자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두 번 연속 아주 쓸데없는 것이 나와서 좌절했다. 그러더니 왜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한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한 번만 더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나올 것 같은 기분말이다. 어릴 때는 그런 경험을 통해 뭔가 배우기 어려운데 십 대 후반이 되니 스스로 생각하고 조절하며 배움이 있다는 것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기계들을 얼추 둘러본 후 계산대 쪽으로 가자 랜덤 캐릭터 카드도 있었다. 예전에 시장에 가면 생활용품점에서 랜덤으로 파는 유희왕 카드 세트 같았다. 그 시절 가게 앞에서 간절한 눈빛을 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서너 장이 들어 있는 카드 세트 한 봉지가 아니라 아예 박스로 사주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랜덤의 두근거림이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S는 그때처럼 망설이는 손으로 카드 봉지를 집었다. 제 손에 들고 있던 동전을 세어보고 세 개를 골랐다. 한 박스는 몇 세트가 들어 있었을까? 눈으로 대충 보기에도 꽤 많아 보였다. 박스로 사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S는 그러지 않았다. 더 어렸을 때라면 박스로 사달라고 졸랐을까? 점심을 먹고서 그 카드를 몇 개 더 사야겠다면서 다시 가자고 했을 때에야 나는 S가 돈 때문에 더 많이 사지 않았음을 알았다.

다른 층에는 아주 큰 포켓몬 매장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상품이 나와서인지 계산대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매장 바깥의 한편에서는 남자아이가 크게 울고 있었다. 아이를 꾸짖는 어른의 소리도 들렸는데 아이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도 무얼 사달라거나 고집을 부리면서 저만큼 졸라대거나 울지 않았다. 내가 그 얘기를 하자 S는 저 정도 울만큼 갖고 싶은 건 없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이 빠르게 포기하게 된 것은 ‘우리 엄마는 한 번 안 된다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타고난 심성에 욕심이 없기 때문일까. 어쩌면 지나치게 엄마의 눈치를 봤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어릴 때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 둘 있는 엄마 같지 않게 목소리가 작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다 보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윽박지르거나 때리지는 않았지만 말로 상처를 줬던 것 같아 후회될 때가 많다. S에게 이제라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다. 예전에 사달라고 했는데 사주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S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은 욕심이 없는 편이 분명하다.


3. 면세가 안 되는 서점

우리는 점심으로 텐동을 먹고 서점으로 갔다. 식당가로 내려가는데 서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S는 엊그제 못 산 책을 찾으러 애니메이트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서점이 선샤인 시티에 있었다. 애니매이트에는 만화책만 모아 두었는데 이곳은 만화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책들도 많아서 볼거리가 더 많았다. S가 책을 찾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계산대 앞에 잘 보이게 진열된 책에 익숙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자료집이었다! 나는 그림 화집이나 영화의 콘티북 같은 것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눈길이 갔다.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의 선생님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깊게 공부하고 계시던 터였다. 우리나라에도 판매가 될까? 이제 막 개봉했기에 수입이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아마 선생님은 화집의 존재도 모르시겠지? 나는 이 책을 들고 가서 선물할 생각으로 너무 기뻤다. (나는 선물에 진심인 걸까?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을 진심 사랑하는 걸까?) 자료집은 두 종류가 있었고 모두 탐이 났는데 고급 화집이고 두꺼워서 너무 무거웠다. 올 때도 선물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갈 때도 무거운 선물이 가방에 한 자리를 차지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둘 중에 하나만 고르려고 한참을 고민했다. 책의 가격도 적진 않았지만 들고 가는 게 큰 문제였던 것이다. S는 들고 가는 것이 걱정이라면 자신이 들어준다며 둘 다 사라고 했다. 나는 만약 이 책들을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다면 사가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화집 두 개를 모두 계산대로 가져갔다. 다행히 S가 찾던 책도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계산을 하려는데 이곳에서는 면세가 안 된다고 했다. 애니매이트에서 책을 구매할 때는 5천 엔 이상이면 면세를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곳은 제외였다. 약간 아쉽지만,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었으니 그걸로 만족이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여행에서 돌아가는 가방에도 선물의 자리가 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무겁기까지 하다. 나는 선물에 진심인 것이 분명하다,


4. 애니메이트 카페

아직 시간이 남아서 우리는 주변의 애니메이트 카페를 찾아가기로 했다. 주변에 있던 만다라케라는 중고 서점도 들렀다. 지하로 내려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S는 특별히 찾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에 금방 나왔다. 애니매이트 카페는 건물 하나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캐릭터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예약을 했느냐고 물었다. 카페는 오로지 예약으로만 운영한다고 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캐릭터를 고르면 그 캐릭터를 차 위에 프린팅 해주는 것이다. 예약을 안 해서 발길을 돌리며 드는 생각, 이렇게 예쁜 캐릭터를 얹어주는 음료를 아까워서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다른 층에서는 코스프레 의상의 전시와 판매를 하고 있었다. 주로 고교의 체육복이었는데 한 벌 사주랴고 물었더니 S는 손사래를 친다. 건물 전체가 카페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캐릭터가 없다 보니 그다지 볼 것은 없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져서 근처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식사도 하는 곳이었는데 오래된 공중전화와 옛날 잡지로 꾸며 놓은 천장이 낮은 가게였다. 언제쯤 오픈한 곳일까, 오래된 구포의 느낌이었다. 메뉴판을 보는데 커피와 콜라 가격이 좀 전에 우리가 먹은 텐동의 가격과 같았다. 우리가 먹은 텐동이 저렴한 건가? 콜라가 비싼 건가? 뭐 아무튼 아이스커피와 콜라를 먹으니 더위가 좀 가셨다. 이제 슬슬 숙소로 가볼까 하고 나왔는데 방향을 잃어버렸다. 처음에 친절한 여학생이 가르쳐줬던 선샤인 시티에서 나와 만다라케와 애니매이트를 지나 카페까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이곳이 어디쯤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지도를 보면 고장 나는 나는 또 헤매기 시작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또 영혼이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러다 늦으면 공항으로 가는 열차를 놓칠 텐데. 첫날의 악몽이 다시 떠오를 무렵, S가 방향을 찾았다고 했다. 나는 지도를 꺼버리고 S를 따라갔다. 다행히 S가 찾은 방향이 맞았고 우리는 서둘러 맡겼던 짐을 찾아 이케부쿠로역으로 갔다.




여행 4일간 끌어안고 다니던 선물을 겨우 주인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내 가방은 다시 누군가에게 줄 선물로 채워졌다. 나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행의 의미를 선물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행에서 내게 의미 있는 누군가를 만날 일이 없었다면 나는 선물을 끌어안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가 만날 누군가에게 줄 선물로 가방을 채웠다. 여행은 사람이고 선물은 사람과의 연결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선물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사고 지인들에게 나눌 선물을 사면서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 그것은 내 여행을 증거 하거나 자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내 사랑을 전하는 방법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굳이 여행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여행지에서만 살 수 있는 특수성은 있다. 내가 덕질을 위해 사는 굿즈와 마찬가지로 여행지에서만 살 수 있는 희소성을 선물하니까. 하지만 내 행동 패턴을 보니 나에게 여행은 선물이고 나는 선물을 사람과 연결하는 다리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행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고 여행을 통한 선물의 주고받음은 내 세계의 확장을 위한 도구라고 위안을 삼으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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