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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04. 2024

놓치기 쉬운 것들

여권부터 교통패스까지

1. 기한 남은 여권 재발급

여행을 생각하며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여권이다. 내 여권 기한은 10년이었으나 남자아이들은 군대 문제도 있고 해서 10년 기한 여권은 잘 안 만들어 준다고 한다. 전에 여행할 때 5년 만기로 만든 S의 여권은 유효기간이 며칠 안 남아 있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그 안에 여행은 어려울 테니 여권을 새로 발급해야 했다. 서둘러 사진을 찍으러 갔다.

S는 주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는데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그랬는지 이 날따라 밝은 미색 티셔츠를 입고 나섰다. 나는 의아하면서도 한편 알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데, 사진관에 가서야 의문이 풀렸다. 여권용 사진에는 상의가 흰색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5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내 의식은 몰라도 무의식은 알고 있었나.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던가 보다. 다행히 사진관은 의상 대여도 하고 있어서 어두운 양복 상의를 빌려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눈썹이 보여야 한대서 눈을 가리던 앞머리를 옆으로 고정시키려 헤어무스를 썼더니 어색한 스타일이 되었다. 미리 미용실에서 앞머리를 다듬었어야 했는데. S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S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리저리 만져보는데 등에 땀이 다 났다. 여권 사진 하나 찍기도 쉽지 않다.

재발급은 온라인 신청도 가능하다고 해서 추가 비용을 내고 사진을 파일을 받았다. 하지만 신청하려고 하니 미성년자는 안 된다고 했다. 미성년자의 온라인 재발급 신청이 안 되는 줄 알았으면 사진 파일 추가비용을 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미성년자 여권은 신청도 직접, 수령도 직접만 가능했다. 대신 본인이 가지 않고 보호자가 신청할 수 있다. 우리 지역의 시청은 화요일에 여권 신청 민원업무를 야간까지 한다고 했다. 다음날 퇴근 후에 들러 신청할 생각으로 S의 사진과 가족관계 증명서를 챙겨서 출근했다. 야간 업무가 맞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데 유효기간이 남아 있는 여권은 필히 지참해야 한다고 했다. 두 번 발걸음 할 뻔했는데, 미리 전화하길 다행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쉬는 날 낮에 방문하여 신청했는데 그 사이 여권의 유효기간은 끝나 있었다.

시청 민원실의 여권 신청 창구 앞에는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자 두 분이 서류 작성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나는 이 정도 서류 그까이꺼 혼자 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종이 양식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가온 봉사자는 내가 체크한 부분을 지적했다. 새로운 디자인의 전자여권이 나오면서 변경 전 여권을 소진하기 위해 발급수수료를 할인하고 있었는데, 대신 여권의 장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여권 발급 수수료는 45,000원인데 비해 초록 여권은 15,000원이니 나는 망설임 없이 예전 여권을 선택하고 적은 장수를 골랐던 것이다.

또 하나 보호자 전화번호에는 부모가 아닌, 여행 시에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의 번호를 적으라고 했다. 가끔 아이들 학교에서 서류를 내라고 할 때 부모 외 보호자의 연락처를 묻기도 하는데 그럴 때 조부모나 이모고모삼촌이 없는 사람은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었다. 이번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애들 할머니 전화번호를 썼다. 그리고 이름을 쓰려는데, 아뿔싸. 이름을 먼저 써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번호를 먼저 써버렸다. 새로 한 장을 꺼내는데 봉사자는 쿨하게 괜찮다면서 이름이라고 쓰여진 곳에 줄을 죽죽 긋고는 그냥 뒤에 쓰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이제 이런 간단한 서류 작성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된 건가. 왠지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혹시나 틀릴까 봐 S의 영문 이름을 적어 갔는데 재발급이라서 서류에 다시 쓸 필요가 없었다. 예전에는 서류에 사진도 붙였던 것 같은데 사진을 붙이는 칸도, 붙이는 풀도 없어서 두리번거리다 물으니 사진은 붙이지 않고 그냥 제출하는 것이라 했다. 담당자는 지난 여권이나 가족관계증명서 얘기는 하지도 않았고 신청은 1, 2분 만에 끝났다. 아까 서류 작성이 틀린 채로 냈다면 아마 창구에서 고치느라 시간이 더 걸렸겠지. 그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봉사자분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도움쯤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의 속도에 뒤처진 것 같은 생각에 약간 쓸쓸해졌다. 

추석 연휴가 있어 늦어질 줄 알았던 여권은 5일 만에 발급되었다고 외교부 여권정보 알림톡이 왔다. 여권 수령은 신청자가 아니라도 친권자 신분증과 접수증을 가지고 가면 된다고 했다. 새로 발급한 여권을 지난 여권과 비교하니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유효기간이 지나기 전 여권은 새 여권을 만들 때 제출하면 그대로 폐기하는 줄 알았는데 구멍을 뚫어 돌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이전 여권과 새 여권을 바꿔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혹여라도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이전 여권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여권 만들기라는 간단하지만 번거로운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끝낸 기분이었다.


2. 교외체험학습 신청

학생인 S와 함께 여행을 준비하는데 먼저 필요한 것은 학교 일정 체크다. 고등학생에게는 교외체험학습 신청 불가 기간이 있는데 그건 시험 본 후 성적 확인 기간이다. 여행 날짜는 10월 말에서 11월 초가 적당해 보였는데, S는 그 무렵 중간고사를 마치고 수학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즉 금요일에 돌아와 일요일에 출발. 괜찮겠냐 물으니 자긴 더 좋단다. 수학여행까지 다녀온 뒤니까 교외체험학습은 당연히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여행에 임박해서는 약간 긴장했다. 항공권이니 숙박이니 모두 결제한 뒤라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학교에서 성적 확인 기간이라며 허가를 안 해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S는 어차피 성적 확인하고 이의를 제기해 본 적 없다며, 자기는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상관이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가능하다고 했는데 해외여행의 경우에는 항공권의 복사본을 제출해야 하고, 항공권에 나온 날짜로만 교외체험학습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에서 밤늦게 돌아와 다음날까지 학교를 쉬려던 계획은 어긋났다. 게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늦춰져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더욱 늦어질 예정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귀국 비행기라도 좀 이른 시간으로 하면 좋았을 것이다.


3. 원하는 마음의 크기

3박 4일 여행 중 하루는 가마쿠라를 가고, 하루는 후지산을 보고, 하루는 여유롭게 시내를 구경하며 영화도 볼 생각이었다. 세 가지 굵은 일정 외에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는데 최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열 편을 모두 보고 나누는 세미나를 하면서 지브리 미술관에도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자칫 빡빡한 일정이 될 수도 있지만 이왕 도쿄에 가는 길이고 다음은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마음었다. 하지만 표를 구하기는 지 않았다.

지브리 미술관 예매는 전달 10일에 오픈된다. 그러니까 10월은 9월 10일에 예매가 오픈되었고 11월 은 10월 10일에 예매를 하면 된다. 외국인 전용 표는 얼마 되지 않아 오픈되면 금방 매진이 된단다. 내국인용 표 예매는 아이피 우회 등으로 가능한 방법이 온라인에 공유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9월부터는 그런 방법도 막혀서 구매가 불가하다고 했다. 국내에서 구매대행을 이용할까 했는데 실제 표보다 서너 배의 가격이라 망설였다. 여행 일정을 촘촘하게 짜고 웃돈을 얹어서 갈 만큼 꼭 필요한 곳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10월 10일 오전 10시 오픈에 예매를 시도해 봐서 성공하면 가고, 아니면 포기하기로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예매는 실패했다. 미리 사이트를 열어 놓고 기다리다가 10분 전쯤 새로고침을 하자 벌써 웨이팅이 시작되어 있었다. 대기 시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매 사이트의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 덕분에 꽤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의 예매 사이트에 비하면 느려도 너무 느렸다. 한 시간쯤 기다리다 나는 출근 시간이 되어 사이트를 켜 놓은 채 출근했다. 마침 쉬는 날이던 남편이 모니터 앞에서 다시 한 시간 이상 기다려 겨우 들어갔는데 창에는 이미 매진만 가득했단다. 나는 깔끔하게 마음을 비웠다. 구매대행을 이용할까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매우 잘한 것이었다. 웃돈까지 얹어 산 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또 얼마나 조급해했을까 생각하니 그러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4. 교통패스의 늪

가장 아쉬웠던 것 중 하나는 교통패스였다. 이전에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관광지 할인 패키지권을 사고 본전을 뽑겠다고 아이들을 힘들게 했던 일이다. 야경을 보겠다고 시티투어버스를 탔는데 피곤에 지친 아이들은 차가 출발하자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 선택을 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곤 아이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다른 일정을 정하지 않았고 교통할인권도 사지 않았다. 그런데 3일간 쓸 수 있는 광역 패스가 있다는 말에 또 홀랑 빠져 들었던 것이다.

도쿄 와이드 패스는 나리타 공항에서 넥스(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가마쿠라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고, 신주쿠에서 후지산까지 가는 급행열차인 후지카이유를 탈 수도 있어 비용면에서 꽤 가성비가 있었다. 게다가 10월부터는 가격이 올라서 저렴하게 이용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무슨 홈쇼핑도 아니고 이 말에 나는 깜박 넘어갔다. 패스신칸센도 탈 수 있지만 더 욕심내지 않고 3일간 한 번씩만 사용하겠다며 나를 합리화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와구치코에 갈 때 특급 기차인 후지카이유를 타야 본전이 된다는 것이다. 가와구치코는 신주쿠에서 버스로도 갈 수 있고 가격도 훨씬 저렴했는데 그래도 버스보다는 변수가 적은 기차가 좋다는 핑계도 한몫 거들었다. 

패스구입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좌석 예매는 30일 전에만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는 날은 10월 말이었으므로 9월 말에 오르기 전 가격으로 패스권을 사고 10월에 기차표를 예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9월 30일에 예매 사이트에서 패스를 구입하고, 10월 1일에 그 패스를 이용해 기차 좌석을 예매하려는데 예매 사이트가 먹통이 되었다. 아마도 요금이 오른 패스로 전환하되는 시스템이 아직 구축되기 전이어서 그랬던가 보다.

며칠 후 사이트가 정상화되었다는 메일이 와서 원하는 시간대로 기차표를 예약했다. 나리타 공항에서는 공항 도착 예정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 가마쿠라행 직통 열차를, 가와구치호수행 급행열차는 아침 9시 반에 신주쿠에서 출발, 가와구치호수에서 신주쿠로는 오후 4시 반경 출발하는 차로 예매했다. 달리는 동안 창으로 후지산을 볼 수 있다는 방향으로 신중하게 좌석을 골랐다. 신주쿠에서 출발하는 시간도 너무 이르지 않은 시간으로, 그리고 호수 주변을 충분히 산책하고 즐길 시간을 여유롭게 두고 돌아오는 기차까지. 일찍 서둘러 예약하며 원하는 시간과 좌석을 골라서 뿌듯했고 이제 출발만 하면 될 것처럼 마음이 풍족해졌다.

하지만 며칠 뒤 우리의 여행 무렵 도쿄에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를 봤다. 비가 오거나 흐리면 후지산의 그림자도 못 볼 수가 있다고 했다. 후지산 가는 날을 다른 날로 바꿔야 할까? 여행 날짜를 변경하기는 늦었기에 동선을 바꿔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숙소를 정했고 여러 가지가 복잡했다. 나는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고 그냥 운에 맡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패스가 없었다면 원하는 시간에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패스를 구하고 표를 예매하는데 들인 나의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본전 생각에 취소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역시 패스의 늪에 빠지면 다른 것들이 다 보이지 않게 된다.


그동안 여행에서 일 순위로 생각했던 것은 가성비였다. 일에서 언제나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니 여행에서도 비용의 효율성을 가장 먼저 고려했고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들어설 자리는 좁혀졌다. 원하는 마음의 크기를 비교하며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는데 욕심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은 느긋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어디서도 느긋할 수 없었다. 여행을 마무리할 즈음에야 또 나는 교통패스의 늪에 빠졌던 것임을 자각했다. 맨 앞에 두어야 할 것은 가성비가 아니라 여유였다. 

여권 재발급에 관한 여러 글을 미리 검색하고 읽었는데도 작은 부분은 파악하지 못했다. 남들이 올려준 정보를 읽고 또 읽고 하면서도 꼭 빠뜨리는 것이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데, 이 정도는 이제 식은 죽 먹기라며 온라인으로 얻은 정보만 갖고 철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권 사진의 흰 상의 금지와 미성년자 온라인 신청 불가, 그리고 기간 만료 전인 여권 지참 등 아주 작지만 중요한 사항을 놓쳤다. 그게 뭐 대수냐 싶지만 뭐든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며 빠릿빠릿 움직이는 내 모습을 꽤 자랑스러워했던 나에게는 좀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간단하고 일차원적인 생활의 문제 앞에서도 허둥지둥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젊음에서 늙음 쪽으로 한 발 다가간 느낌이랄까. 놓치기 쉬운 것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그런 것들을 완벽하게 커버하기란 쉽지 않고 아마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도 생의 일부라 여기는 여유로운 마음이 바로 여행의 기술이자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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