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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Dec 12. 2019

전자동 세탁기를 바라보는 소회

엄마의 세탁기

세탁기를 새로 바꿨다. 결혼할 때 산 세탁기로 열다섯 해 넘게 쓰고 있었다. 아직 빨래는 되지만 오래되어 소음이 심하고 통에서 오히려 검은 곰팡이가 묻어 나오기 일쑤였다. 세탁수조 청소를 해서 더 써야 할까 하다가 그냥 바꾸기로 했다. 이번에도 통돌이로 사기로 했는데, 몇 년 전 드럼 세탁기를 사려다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기에 포기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오래된 아파트라서 세탁기를 넣어야 할 화장실 문이 작아 드럼 세탁기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주문까지 마쳤는데 설치가 안된다고 해서 그냥 쓰던 세탁기를 계속 쓰기로 했다.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 그때 사자며.

그런데 아직 이사할 준비는 안 되었고 쓰던 걸 더 쓰는 건 무리라서 결국 다시 통돌이 세탁기. 기능면에 호불호가 있어 드럼 쓰다가 다시 통돌이를 쓴다는 분들도 있으니 그건 괜찮다. 다만 맘에 안 드는 것은 사용 방법이 조금 낯설다는 것. 시스템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새로 온 세탁기에는 버튼이 많다. 그래 봐야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몇 개 안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건지. 또 하나 다른 점은 뚜껑이 유리로 되어 있어 세탁하는 과정이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이라 그런지 세탁하는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게 또 신기하다.

 






'전자동'이라는 것이 지금은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 나온 세탁기는 그렇지 않았다. 빨래를 해서 옆의 탈수기에 빨래를 옮겨 넣고 탈수한 후에야 빨래가 끝났다. 그래서 전자동 세탁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호들갑스러웠던가. 큰 집에도 전자동 세탁기를 산 뒤 탈수기인 '짤순이'를 버렸다.

우리집은 세탁기를 아주 늦게 들였다. 이모들은 제일 큰 언니인 우리 엄마가 아직도 손빨래하는 것을 보다 못해 아버지에게 왜 세탁기를 안 사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우리집에 세탁기가 셋이나 있는데 세탁기가 왜 필요하냐며 오히려 당당했다. 엄마와 나와 내 여동생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황당해하며 화가 난 이모들은 얼마 후 우리집에 세탁기를 들여놓아 주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기억난다. 이모들에게 미안하면서도 손빨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던 것이다. 큰 집에서 버리는 '짤순이'를 얻어다 손빨래를 해서 겨우 탈수만 하고 빨래를 널 때였다. 그런 형편이니 '전자동' 세탁기는 엄마에게 신세계였던 것이다. 나야 세탁기에 빨래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림을 하고 있으니 그 기쁨을 반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전자동이라고 해도 나는 요즘 세탁기가 못 미더워 중간중간 세탁기를 멈추고 뚜껑을 열어 세제와 섬유 린스를 직접 넣는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지키고 중간중간 체크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처음 세탁기를 받았을 때 엄마의 심정이 이랬을까. 세탁기 안이 들여다보이길래 이번엔 진짜로 '전자동'을 실현해 보았다. 물론 빨래를 넣고 꺼내어 너는 것은 사람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기계는 기계일 뿐이니까. 그런데도 옛날 우리 아버지처럼 밥은 밥통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튼, 빨래를 넣고 세제와 린스를 모두 넣은 후 뚜껑을 닫고 세탁기의 '전자동'을 지켜보았다. 먼저 수조를 몇 바퀴 돌려 빨래의 무게를 가늠한 뒤 물 높이를 자동으로 정하고 물이 나온다. 몇 번 물이 나왔다 그쳤다를 반복하며 적당한 선에 맞추더니 세탁을 시작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옛날의 세탁기를 떠올린다. 예전 세탁기에 비해 물살의 세기나 먼지를 걸러내는 정도는 훨씬 좋아졌을 것이다. 중간에 한번도 열지 않아도 린스를 넣고 탈수하는 것까지 혼자서 알아서 한다. 끝나면 종료를 알리는 알림 멜로디가 나온다. 전자동 세탁기의 위엄을 알리며. 가사 노동을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래도 '전자동'의 느낌은 예전보다 감동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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