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번째 삶 Dec 17. 2019

무엇을 어떻게 쓸까/이오덕

중고서점에서 만난 책

  내가 기억하는 중고서점은 지하였다.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면 사방이 책으로 가득했다. 지하의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간은 어둑하고 미로처럼 비좁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요즘 내가 찾는 중고서점도 지하에 있다. 계단을 내려가 문으로 들어가면 밝고 널찍한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곳에 서서 보면 구석구석에 사람들이 있다. 의자가 없는 만화 코너에는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이, 계산대 근처 아기자기한 굿즈들을 살펴보는 이, 아이들을 데려와 작은 책상에 앉아 함께 책을 보는 이도 있다. 내가 중고서점에서 가장 먼저 살피는 곳은 일 년 이내 출판된 책 코너.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앞에 있는 코너이기도 하고 새로 출판된 책 중 내가 모르는 것을 둘러보기 위함이다. 중고 서점이니까 아주 잘 팔리는 책들보다 빨리 중고 서점에 들어온 책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여기서 맘에 드는 책을 만나기도 한다. 새로 들어온 책을 쭉 한번 훑어보고 검색대로 갔다.




  오늘은 새로이 필사할 책을 골라보려고 들렀다. 글쓰기 강좌 선생님께 배운 방법 중에 그것이라도 꾸준히 해보자는 생각에서다. 검색대에서 '어떻게 쓸까'를 검색했다. 이오덕 선생님의 <무엇을 어떻게 쓸까>가 있었다. 찾아가니 글쓰기에 관한 책만 모아 놓은 '글쓰기' 코너가 따로 있다. 이오덕 선생님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도 눈에 띄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이오덕 선생님의 글을 읽은 건 아니다. 돌이켜 보니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나눠 준 글쓰기 공책 제목이 '삶을 가꾸는 글쓰기'였다. 공책의 제목을 선생님의 책에서 따온 모양이다.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는 혁신학교였다. 아이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시키려고 교사들이 야심 차게 두꺼운 글쓰기 공책을 만들어 학기 초에 학교의 모든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을 것이다. 매년 다른 제목, 다른 두께로 만든 공책을 나눠 주었으나 각 담임선생님의 역량에 따라 그냥 빈 공책이 되거나 연습장이 돼버리기 일쑤였다. 어느 해인가 아이가 가져온 공책은 앞에 열 장도 채 못쓰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워낙 글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공책의 활용은 선생님의 역할이 아주 컸을 것이다. 써진 글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든 아이들로 하여금 채워나가게 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무리 좋은 취지로 여러 가지 혁신 교육을 시작한다고 해도 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열의가 있느냐 하는 차이가 교육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의 방증이었다.


  이오덕 선생님의 <무엇을 어떻게 쓸까>는 청소년에게 주는 글쓰기 길잡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글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나에게 딱 맞는 수준의 글쓰기 책일 것 같다. 열심히 읽고 필사도 해야지,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뿌듯한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깨끗한 책인데 2,700원. 보리출판사에서 2004년에 9쇄로 나온 책으로 정가는 6,000원이다. 지금은 절판된 책이고 요즘 책 가격에 비해 너무 저렴한 데다 중고로 나왔으니 정가의 50%도 안된다. 한 번도 보지 않았거나 한 두 번 보고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을 책. 중고서점에서 만나는 책들은 어디에 있다 왔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이 책은 누군가의 책장에 있었을까? 아니면 어느 작은 서점에 꽂혀 있었을까? 결국 출판사로 반품되어 들어갔을까? '보리출판사'라면 아이들이 어릴 때 보았던 세밀화 책이 떠오른다.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 덕분에 아이들이 오랫동안 좋아하며 들고 다니던 책. 크기는 작았고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져 아기들이 입에 넣고 빨아도 잘 찢어지지 않는 책이었다. 그런 고마움이 있는 출판사인데, 오늘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이오덕 선생님의 귀한 책을 깨끗하고 저렴하게 만나고 보니 다시 고맙다.




  집에 오자마자 매일 한 꼭지씩 읽을 요량으로 펼쳐 들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술술 읽혔다. 조금만 욕심내면 하루에 다 읽을 수도 있겠다. 청소년이 쓴 글을 담아 거기에 첨삭하듯 말씀을 붙였다. 꼭 청소년만이 아니라 나처럼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남기신 말씀 이리라. 하루에 다 읽고서 덮어 놓을 책이 아니라 천천히 꼭꼭 씹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책이다. 오랫동안 볼 좋은 책을 만난 중고서점이 가까이 있어 새삼 반갑다.



이것은 마치 연극의 한 판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꾸며낸 연극이 아니고 삶의 한 순간이다. 몸으로 겪은 것을 그대로 잘 생각해 내어서 쓰면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감동을 준다.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저마다 가지각색으로 다른 연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런 귀한 연출을 하면서도 그것이 귀한 것인 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가 보고 듣고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것을 자세하게 붙잡아 차근차근 쓸 줄 아는 사람만이 슬기로운 삶을 제 것으로 하여 몸에 지닐 수 있는 것이다.

- 이오덕, <무엇을 어떻게 쓸까> 中

    






매거진의 이전글 오사 게렌발의 그래픽 노블, 시간을 지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