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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30. 2020

나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영화 <건축학개론>

서연은 매운탕의 이름이 불만이다. 알탕이나 갈비탕은 이름만 봐도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는데, 매운탕은 뭐가 들어도 그냥 매운 탕이라는 것이다.


나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속엔 뭐가 들었는지 모르고 맵기만 하니까.


서연은 15년 만에 첫사랑 승민을 불쑥 찾아간다. 자신에게 집을 지어주겠다던 승민의 말을 기억하고 찾아갔지만 승민은 그 말은커녕 서연의 존재도 잊은 것 같다. 결국 서연이 살던 제주 집을 함께 증축하기로 하고 건축주와 고용인이 되어 자주 만난다.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 어느 날 둘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서연은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너 좋아했어, 너도 나 좋아했지? 같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매운탕 같았다고.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지만 결혼을 앞둔 승민에게 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지나버린 시간들에 대한 원망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영화 <건축학개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내게도 삶이 맵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간. 나 스스로 지워버리고 싶던 시간.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던 하루하루. 그곳에서 뛰쳐나올 수 있었던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지나온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 중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별로 없지만 단 하나 잘했다고 칭찬할 일을 꼽는다면 바로 그것이다. 매운탕 같은 삶 속에서 벗어난 것. 그때 거기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지옥 속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아 언제까지나 내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매운탕 속에서 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갔다면 지금과 같은 평안함은 없었을 것이다.


서연이 매운탕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자 첫사랑을 이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과거는 과거로 간직한 채 자신의 삶을,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삶을 살게 되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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