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성선설을 믿었다. 순수함의 결정체인 아기가 무슨 악의가 있을까? 태어나 경쟁 사회에 자라나면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을 배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20대 때까지만 해도 사람은 바뀔 거라고 믿었다. 20대 초반엔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내가 누군가의 다친 마음을 치유해 그 사람의 인생도 바꿔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게임 속 힐러가 된 듯이.. 인간관계에서는 진심을 보이고 노력하면 이미 깨진 관계도 다시 전처럼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만했었다.
한번 깨진 신뢰 관계는 금이 간 유리접시처럼 결코 온전히 다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을 살면서 배웠다. 어떤 인간들은 특별히 누가 잘못한 게 없어도 본인 스스로만 위하고 남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변화시키려 해도 절대 설득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배웠다. 한 번은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가시 돋치고 경쟁적인 동료의 폰 케이스 뒷면에 보란 듯이 '나만 잘되게 해 주세요'가 쓰여있었다. 그 글귀를 보고 놀라 대체 저 심리는 무엇일지, 저 동료의 유년시절은 어땠을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 그날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20대를 지나 3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 나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저 사람도 본인만을 위할 것이다. 저 사람은 생각보다 나를 생각해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렇게 데이고도 마치 잡초가 또 한 번 살아나듯 남에게 기대하고 또 한 번 믿어보려는 내 안의 순수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다시 한번 짓밟히도록 세상은 보란 듯이 나에게 실망을 주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 것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또한 사람이었다. 나를 위해 용기 있게 대변해서 같이 나서주는 사람, 내가 힘들 때 묵묵히 뒤에서 나를 서포트해 준 사람, 다치고 웅크려진 나를 일으켜 세워 같이 가자고 부축해 준 사람, 나보다 더 분노하며 같이 욕을 해준 사람, 늘 내 곁에서 내 상태를 살피며 내가 웃으면 같이 웃고, 내가 울면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까지.
사람에 의해 다친 마음은 사람을 통해 위로받았다. 절대적 선도 없고, 절대적 악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그 중간 어디쯤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선이 되고 어느 시점에서는 누군가에게 약간의 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인간은 정말 악한 걸까'라는 자조 섞인 질문을 하기엔 세상에 위로가 되고 선한 행동으로 크고 작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삶을 바라보는 내 초점을 악한 자들을 바라보는 것에서 조금만 옮겨가자. 선한 자들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으로 내 시선을 옮기자. 나 또한 그들을 닮고자 애쓰면서 살아보자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