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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 Aug 20. 2022

[책 구경] 깊은 밤 엄마를 만났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의 책

주말 아침, 마지막 방학 주말을 즐기던 첫째 아이를

다급히 불렀다.


얼른 옷 입어, 일단 나가자!


아빠와 동생과 함께 신나게 놀고 있던 첫째 눈이 동그래진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갑자기 어딜 가는 거냐며 집에서 놀고 싶다고 투정거렸지만 함께 손을 잡고 나왔다.


아이와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아파트 후문의 논술학원. 아파트 끝동에서 끝으로- 약 10분 거리를 종종걸음을 달려 아이를 논술학원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가 들어간 뒷모습을 확인한 후 1초 머뭇거린다.


다시 집에 갔다가 50분 후 데리러 와야 하나? 그러면 오가는 시간 20분 빼면 거의 바로 나와야 하는 건데. 너무 촉박하다. 어쩔 수 없다, 카페로 고! 논술학원 바로 옆, 동네 작은 카페가 들어와서 쉬라고, 책 보고 가라고 손짓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카페 벽 하나를 두고 아이는 벽 너머에서 책 수업을, 엄마는 아메리카노와 함께 책 타임을-그렇게 주말 오전을 책과 함께 즐긴다.(아이야, 책 즐기는 것 맞지?)


아파트 후문의 작은 카페는 1인 식당, 심야식당을 닮았다. 다른 손님들과 마주칠 일 없이 오롯이 혼자, 카페 사장님과 음악을 즐기고 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 게다가 작은 책꽂이에 살포시 놓인 5권의 책들이 모두 내 취향이었다. 아직 2권은 못 봤지만.


<깊은 밤 엄마를 만났다>

오늘은 이 책이다.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 약 40분의 시간 동안 아메리카노 한 잔과 이 책을 들이리라.


엄마가 된 이후로는 내 시간을 찾기란 참 어렵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글을 쓰고 싶었으나, 막 잠에서 깬 아이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흠. 좀 더 자라고 회유해봤으나 실패! 육아 n연차이지만 아직도 숨죽이고 누워 핸드폰을 하다 막 자다 일어난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죄라도 지은 강아지처럼, 흠칫 놀란다.


글쓰기는 포기하고 아이와 흠뻑 스킨십을 해준 후, 울 엄마가 만들어준 꼬리곰탕을 끓여 아침을 먹인다. 식세기 돌리기, 식세기 세제 주문하기, 아일랜드 식탁 정리하기.. 등등 주부로서의 아침은 시작되었고 나만의 시간은 오늘의 육아를 다 끝낸 후 밤에나 돌아온다. 그것도 내가 아이를 재우다가 곯아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러니 오늘 짤막한 이 찰나의 순간에 카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래시계의 타이머를 돌려둔 것처럼 자유시간이 점점 줄어들고는 있지만 이게 어디냐, 싶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목을 보고는 눈물이 나는 내용일까 봐 다른 책으로 바꿀까 했다. 이 시간을 가볍게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펼친 페이지에서 글쎄..


너냐? 하고 묻는다.


정수리에 잔디 같은 잔머리가 나 본 적 있나요?

가방 크기가 30cm인 것을 주로 드나요?

그 가방 안에 엠보싱 물티슈가 들어 있나요?

소리 없이 영화나 드라마를 본 적 있나요?

휴지심과 스티로폼 상자 같은 거 모아보셨어요?

식당 가서 된장찌개에 고춧가루 들어가는지 물어보세요?

엄마죠???라는 페이지가 눈에 들어온다.


난디?? 나.. 나.. 부르셨어요??


그렇게 오늘의 책은 이 녀석으로 선택되었다.


이 시국 가정보육

집안에서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정신과 육체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었다. 아이 둘 데리고 있으며 삼시 세끼 밥을 차려 먹여야 하고.. 나는 어디로 도피할 수도 없고...(p.16)



난.. 디??


17개월 차이의 아이 둘을 3년 간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고 가정보육을 했더랬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이제 세상을 막 걸어 다니며 호기심 가득한 첫째를 둘째가 자라는 배 위에 의자 삼아 안고 다녔다. 둘째가 태어난 후로는 앞으로 안고, 뒤로 업고 다니며, 스타벅스 앞을 지나갈 때마다 유리창 너머의 카페 풍경을 부러워해야만 했다.


저지레 한참인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카페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기에 '저기 앉아서 커피 향 맡으며 글, 딱! 한 줄만 써보고 싶다.'를 몇 년 간 갈망해왔다. 어쩌다 큰맘 먹고 아이 둘, 유모차에 태워 카페에 가곤 했지만 내 손에는 글이 아닌 5분짜리 바나나와, 10분짜리 떡 뻥과- 3분짜리 장난감, 그리고 더 이상 나를 못 기다려주겠다며 아이가 쏟은 것을 닦아내기 정신없는 물티슈만 쥐어져야 했다.


이 책을 보다가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더욱 지금 (비록 아이가 나오는 시간을 카운트다운 세고 있지만) 잠시의 카페 독서 시간이 허용되는 어쩌다 만난 순간들이 소중하다.


마지막 남은 커피의 쪼로록은- 아이가 나오기 직전, 급히 들이켰지만 맨 위층의 다섯 모금은 충분히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입 속에 머금다- 삼킬 수 있었음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육아라는 노동에 그 험난한 전투에 숨 쉬다가 겨우 겨우 잠들어 숨을 쉬고 있는 이 땅의 성스러운 엄마들이여, 노동이란 기차에서 얼른 내려 환승하기를. (p.42)


세상을 향해 호기심 어린아이들의 눈빛과 에너지, 만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 내 살결을 부비는 그 작은 손길과 미소뿐 아니라 매일을 볶고 화내고 싸우는 현실까지도 우리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이 내게 준 특별한 소명으로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이 아닌, 세상이 말하는 엄마, 나 자신을 위해.(. 43)



https://www.instagram.com/p/Chd8Vepp87T/?igshid=MDJmNzVkM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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