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가득한 순간, 듣기 좋은 음악입니다. (아래 링크 클릭!)
모든 것이 맞닿아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고 해도 딱히 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상할 만큼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
나에게 음악을 듣는다는 건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다. 가느다란 이어폰을 통해서 내면세계를 음악으로 채운다. 무너질 땐 솟아오르는, 화가 날 땐 질러주는, 우울할 땐 상큼한, 기분 좋을 때도 역시. 내면의 감정과 쏟아져 들어오는 음악은 충돌하며 나름의 균형을 찾는다. 그렇게 나는 음악에 의존한다.
내 앞자리에 앉아 틀린 문제 위에 몇 번이고 빨간색 빗금을 그어대던 그 아이는 정말이지 음악을 크게 듣곤 했다. 이어폰을 뚫고 나오던 그 소리에 다른 아이들이 그의 청력을 걱정할 정도였다. 가느다란 샤프심으로 수학 문제를 깨알같이 풀어대던 또 다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음악을 작게 들었다. 우리는 그게 들리기는 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주로 체리필터의 음악을 들었다. 책상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Head up!'을 외치면서. 모두가 무언가에 파묻혀 있던 시절이었다.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현실을 선택했고 새벽 막차를 타고 집에 갈 때면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코코어의 <아무래도>를 <암울해도>로 읽던 시절이었다. 삶의 질문들이 너무 급작스럽게 늘어났고 정체성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무너지는 순간을 붙잡기 위해 나는 서둘러 더 많은 음악을 초대해야 했다.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을 조금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된 몇 년이 있었다. 리허설을 보고 공연을 보고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쓴 가사를 공들여 정리했다. 하루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 시간 이후 이제 나에게 음악을 한다는 것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물론, 음악을 글이나 영상으로 표현하는 일도 포함된다. 공중에 흩어지는 조각들을 어떻게 딱딱한 텍스트 안에, 또 움직이는 영상 안에 담나 싶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들을 표현할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 헤맸고, 공유했고, 모든 것이 비트에 맞춰 춤을 췄다. 그 모든 게 하나로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언어가 되었다. 지나고 나니 꽤 이상한 시간이었다. 그곳의 시계는 멈춰 있음이 분명했고 나는 그 시간이 가끔 그립다.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하는 이들과 멀어졌다. 여행을 떠났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그 모든 순간에도 틈틈이 손님은 초대되었고 수많은 목소리가 함께했다. 같은 선상에서, 때로는 이야기의 정반대편에서 나는 그들을 바라봤다. 한참을 우두커니. 그리고 결국에는 같이 흘러간다. 데미안과 함께 파리를, 전기 흐른 속을, 그러다 뱀장어에게 물리기도 한다. 아, 이건 정말 <아무래도> 대중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