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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Feb 03. 2022

[에세이] 나의, 곰

나의, 언니


동글동글하고, 한 손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눈코입이 파묻힐 정도로 갈색 털이 북실북실한, 그런 곰 모양의 지갑을, 연휴를 맞이하여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 이것 봐라." (베시시)

나의, 곰돌이

사촌 동생이 내가 주문한 지갑을 바라보며 "... 누나가 몇 살이지?"라고 묻는다. 또 다른 동생은 한숨을 푸욱 쉬며 "언니, 말을 말자."라고 포기한다.


"왜!! 뭐가 어때서!! 귀엽잖아..." (주눅)

10년은 쓸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나에게 동생은 또 다시 "... 10년 뒤엔 누나가 몇 살이지?" 묻는다. (일동 침묵)


그럼 여기서, 조금 뜬금없지만 사실은 필연적이었던 전개로 나아가보자.


나의 친언니의 별명은 곰이었다. 언제부터였냐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꿀단지를 들고 천진난만하게 돌아다니는 곰돌이 푸우를 닮아서, 그는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생일 때 푸우로 만들어진 온갖 물건을 선물 받곤 했다. 현재 교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별명은 여전히 '곰 선생님'이기도 하고, 그가 만든 이메일 주소에도 역시 곰이 들어간다. 그래서일까? 나는 곰을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언니를 졸졸 쫓아 다니는 동생이었다. 까불거리고 덜렁거리는 막내였던 나는 언제나 차분한 언니가 신기하고 좋았다. 언니가 피아노를 치면 얼른 쫓아가서 굳이 꼭 옆에 서서 이중주를 하고, 언니가 화장실을 갈라치면 우다다 뛰어가서 "내가 지금 딱 가려고 그랬어"하며 언니를 제치고 들어갔다. 언니가 친구를 만날 때에도 쫓아가려 했고, 중학생이었던 언니가 수학여행에서 사온 시계 목걸이를 달라고 떼쓰는 철없는 초딩이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동생 주라면서 시계 목걸이를 내 손에 쥐어줬는데, 언제나 싫은 소리를 꾹 참던 언니가 그 순간 너무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얼른 시계 목걸이를 돌려줬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날때부터 언니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좋아하던 철부지 동생이었다. 학창 시절 언제나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언니를 친구들에게 종종 자랑하곤 했는데, 때때로 그 이유는 그냥 곰처럼 귀엽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언니가 저 멀리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걸어가는 뒷모습이라도 보이면 "저기 보이는 저 사람이 바로 우리 언니야. 그럼 나 먼저 가볼게!"라며 나풀나풀 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냥 나는 언제나 언니가 좋고, 자랑스러웠다.


언니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던 건, 언니가 대학생일 때였다. 귀여운 곰의 모습을 한 채, 이제 막 이십 대가 된 언니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했다. 당시 우리집이 조금 힘들었던 시기였기에, 언니는 과외비를 집안 생활비로 꾸준히 보탰다. 어느 날 잘 마시지 않는 술을 친구들과 마시고 귀가한 언니가 "힘들다"라고 짧게 뱉은 말을 듣고 고등학생이던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얼른 커서 언니 옆에 든든하게 서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장녀 역할을 하는 언니가 멋있고 미안했고, 무뚝뚝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편을 들어주는 언니가 고마웠다. (비록 언젠가는 울면서 "언제 우리 둘이 영화관이라도 간 적이 있어?"라고 외치던 나에게 언니는 무덤덤하게 "영화관으로 나와."라며 말없이 영화를 보여줄 뿐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 날엔가, 나에게 늘 시큰둥한 것 같던 언니가 사람들에게 "제 동생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하는 순간이 있었다.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괜시리 처음 받아보는 인정같아 마음이 뭉클했다. "내 인생은 굴곡 없이 안정적일지 몰라도 큰 성공은 없을 거 같아, 하지만 넌 다르지."라며 용기를 줄 때, 또 나이가 지긋해지는 아빠 엄마를 오로지 둘이 함께 돌봐야할 때, 인생이라는 큰 바다에서 언니라는 사람과 같은 배를 타고 있음에 감사했다.


얼마 전, 언니가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를 하던 언니에게 "뭐 도와줄 거 있어?"라고 물으니 "축가 불러 줄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수많은 노래 중에 고르고 골라 꼭 내 맘 같은 노래를 선택하고, 몇 번이고 연습을 했다. 감동적일 것 같은 영상이 떠올라 직접 의뢰까지 했고 결혼식날 언니와 형부, 가족과 하객들 앞에서 선보였다. 언니와 형부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 노래 안에 미처 다 담겨 있지 않을 만큼 많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전달되었으리라고 믿고,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편안하게 행복하길 바란다. 이제는 언니가 종종 누군가에게 편히 기대어 안락하게 지낼 수 있기에 마음이 놓인다. (형부는 곰을 닮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이 별 거 아닌 요상한 이야기의 결과가 무엇이냐? 바로 나의 곰 지갑 구매는, 필연적이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운가? (응, 많이.) 뭐, 아무렴 어떠한가. 내 손에는 북실북실 곰이 한 마리 생겼는데. 나는 이 지갑을 아주 오래오래 사용할 것이다. 나의 소중한 곰 언니를 떠올리며. (언니의 신혼집에 너무 많이 놀러갔나 싶어서 "내가 너무 자주 왔나?"했더니 언니는 "응."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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