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
5년 전 즈음이었나?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어느 날 문득 영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잠시 영국에서 살며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것. 사실 그 무렵 선배의 sns가 어둡고 우울했기에 나는 선배를 걱정하고 있었고, 영국으로 간다는 결정에 뭔가 작은 응원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그렇게 선배를 위한 작은 선물을 검색하던 나는 '영국은 비가 많이 오는 나라니까 우산을 선물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에는 좋은 우산이 많겠지?' 그럼 아무거나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인터넷을 서칭하던 나는... 영국에서 수입해오는 우산이 잠실에 위치한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잠실이면 집에서 1시간 넘게 가야 하는 거리지만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내온 선배를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목표점에 도착해서 우산을 고르고 있는데... 그곳에 서 있던 분이 자신이 이곳의 사장이라며, 원래는 알바생이 일하는데 오늘 사정이 있어 자신이 직접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우산을 누가 쓸 건지 물어 왔다.
"영국으로 가는 선배에게 선물하려고요."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천천히 우산을 고르라고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선배를 따라 몇 주간이라도 영국으로 여행을 올 것을 권유했다.
"아직은 예정에 없지만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긴 해요."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영국에서 결혼을 해 자리를 잡고 살고 있고, 또 자신도 1년에 몇 번씩 한국과 영국을 오가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영국에 온다면 연락하라고, 밥 한 번 사겠다며 명함을 내밀었다. 형식적인 인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왠지 꼭 한번 영국에 가서 그를 만나 밥을 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5년의 시간이 흘러...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나는 책상 서랍 한 구석에서 그의 명함을 찾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지금이었냐면 그동안 너무 바빴고, 이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요즘따라 영국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후면 영국에서 아들 대학 졸업식이 있어서 곧 영국으로 출국할 예정이라던 그는, 나를 명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냐며 유쾌하게 웃고, 우선 한국에서 밥을 한번 사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우리는 만났다. 그는 더이상 잠실에서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 않았고 홀로 본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 내가 펼치고 접고를 반복했던 우산들이 좁은 매장 가득 걸려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고도 그는 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전이기도 했고 수많은 손님들을 상대했을 테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회사원들로 가득한 식당에 들어가 우리가 시킨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나왔지만 그는 나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침묵 끝에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다.
"제가 영국에서 살아보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제 계획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찌된 영문인지를 들은 뒤 해사하게 웃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게 조금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고 하나둘 곁가지를 뻗어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조잘조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김치찌개를 내 접시에 떠주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대답하느라 식사를 거의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야기를 끝낸 뒤 그는 깨끗하게 비운 내 밥공기를 보고 놀라며 밥을 더 먹으라고 했다.
"아니에요. 한 공기면 충분해요. 제가 밥을 좀 잘 먹어서..."
그는 밥을 잘 먹으면 좋은 거라며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좀 머쓱한 나는 가게를 나서며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가... 그에게 혼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비싼 커피를 너무 자주 아무렇지 않게 사먹는다며 사무실로 가서 홍차를 우려주겠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그를 쫄래쫄래 따라 다시 사무실로 갔고, 그는 자신이 겪은 우여곡절과 화려한 인생사를 들려주었다. 이번에 이야기를 듣는 쪽은 나였다. 한참을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의 자녀들과 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이번에 영국 가실 때 따라갈까요?"
그는 웃으며 혼자 살려면 요리를 해야 할텐데 잘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뭐 그럭저럭 내가 먹을만큼은 한다고 했다. 그는 내 계획이 굉장히 구체적이라서 좋다고 했다. 그리고 응원한다고 했다. 나의 저 외침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또 내가 정말 그곳에서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와서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연락을 나누기로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