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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Dec 31. 2021

[단편] 이별의 질문들

이별의 순간은 죽음과 같다


-넌 네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선호가 물었을 때 재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순간 선호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쎄.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아니, 뭐 그냥.

선호는 순식간에 자신이 던진 질문에서 벗어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별이 빼곡하게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재희가 물었을 때 선호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별일.


재희는 하늘을 바라보는 선호의 옆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선호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바람에 흐트러졌음에도 단정한 느낌을 주는 머리카락, 담담하고 깊은 눈빛, 부드럽고 단단한 코 선을 따라 붉은 입술에 시선이 멈췄을 때, 선호는 재희에게 휙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죽일 것 같아.
-...뭐?

재희는 선호의 한 마디에 심장이 발바닥 밑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재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호가 짧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도 지금까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정말 처음 겪는 일이거든.


그 순간 무언가 깊은 감정을 담고 있는 눈동자. 재희는 그런 선호의 눈동자를 좋아했다. 회색도 갈색도 아닌 빛을 받을 때마다 변화하는 선호의 눈동자는 그의 맑은 영혼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다른 사람에게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눈동자는 재 희 너머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나?

말을 돌리려는 듯한 엉뚱한 질문 속에서 재희는 그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기억나지.
-그때 널 만나러 가기 5분 전에 말이야.

그 순간 재희는 그때 그곳에 있던 선호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너도 기억할 거야. 그날은 정말 비가 많이 왔었어. 넌 우산이 없었고.
-응, 맞아. 그때 네가 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던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잖아.

마치 미워하는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그날은 그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사실은 편의점에서 마지막 남은 우산을 계산할 때, 널 봤거든. 우산을 사지 못한 채 나갔었지.

-... 맞아. 

-그때 너 어때 보인 줄 알아? 마치 세상이 곧 끝날 것을 아는 사람 같았어. 캄캄한 어둠 속 을 걷는 듯 절망적인 표정이었지.


선호의 눈동자는 그날 재희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있었다. 재희의 손짓과 걸음걸음을 기억 했고 재희를 둘러싼 배경과 재희의 상황 모든 것을 짐작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는 쏟아 지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때의 재희에게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해줄 수 있어?


재희는 가만히 우산을 건네던 그날의 선호를 바라봤다. ‘선호는 왜 이 질문을 이제야 하는 걸까? 벌써 2년도 더 지난 일인데.’ 재희는 무언가 불안했지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궁금해?


선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망설이며 다 시 한번 선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날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어.


재희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어디선가 느릿한 바람이 불어왔고 두 사람은 그날 재희의 아침으 로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별다른 것 없던 그 날 아침. 만약 알람시계가 제대로 울렸다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덕분에 뒤죽박죽이 된 외출 준비.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준비하고 문밖으 로 나왔을 때 왠지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 재 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어수선하잖아. 그날은 그런 어수선함이 경쟁하듯 모든 상황에서 터 져 나오던 날이었지.


재희가 힘겹게 뛰어 역에 도착했을 때, 아슬아슬하게 출발하던 기차. 그것을 탔다면 그날은 그럭저럭 괜찮은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기차를 놓치고 나니 다음 기차는 30분 뒤에 오는 거야.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내가 좀 늦 을 것 같다고,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냐고 그 사람에게 연락하려고 하는데 가방 안에 휴대전 화가 없는 거지. 그런데 30분 뒤에 오는 기차를 놓치면 그다음 기차는 2시간 뒤에나 있어서 고민하다가 그냥 연락 없이 30분을 늦기로 했어. 그 사람이 그 정도는 기다려 주지 않을까... 짐작하면서.


선호는 오랜 시간 궁금했던 작은 상자, 어떤 문, 또 다른 세계가 조금씩 자기 모습을 드러내 며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갔을 때 마침내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30분 뒤에 온 기차를 타고, 내내 마음은 좌불안석이었지. 그러면서도 조금 있으면 그 애를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러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야. 그래 다 잘될 거야. 몇 번 마음을 다잡았지. 그때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희는 그날의 긴장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리고 재희가 약속한 기차역에 도착할 때쯤 선호도 막 그 기차역에 도착한 뒤였다.


-기차에 도착하자마자 마구 뛰었지. 약속했던 플랫폼으로. 그런데 없는 거야. 30분밖에 안 늦었는데... 아니 사실은 내가 30분이나 늦은 거지. 그 사람이 연락도 많이 했을 거야. 늘 그 랬듯이 나를 엄청나게 걱정하면서 말이지. 그래서 꼭 만나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별생 각을 다 했어.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 사람의 번호는 단 한 자리도 기억나질 않았던 걸까? 기차역에서 방송을 해볼 걸 그랬나. 내가 지금 여기에 왔다고. 그런데... 그 사람을 찾을수록 그 사람이 기억나질 않는 거야.


선호는 마치 맨발로 기차역을 방황하는 듯한 재희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재희야, 괜찮아. 다 지난 일이잖아. 


선호의 목소리에 재희는 선호를 바라봤다.

-그래 다 지난 일이지. 결국 그 사람과는 그게 마지막이었어.


불안하던 재희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변했다. 그날 재희는 그 사람을 찾을 수도, 만날 수도 기억해 낼 수도 없었다고 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인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 록 기억이 흐려져 무뎌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선호가 재희에게 말 을 걸어 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호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냐는, 결코 작은 곤충 하나도 죽일 수 없을 것 같은 여리고 작은 재희의 손을 보면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을 때. 재희는 예전에는 불가능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그날 선호와 만나 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했다. 지난 2년간 고마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날 씌워줬 던 우산과 나지막이 건넸던 목소리는 서로의 기억 안에서 영원히 따뜻함으로 멈춰있을 거라고 읊조리면서. 그렇게 부드러운 눈빛의 선호와 담담한 목소리의 재희는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무언가 시작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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