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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Dec 31. 2021

[단편] 내부의 엘리베이터

순식간에 위로, 그리고 또 아래로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세계가 변했다. 내가 선택한 세계였지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한 발을 내디디며 그곳에 온전히 던져졌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스스로가 난생처음 문명을 접하는 미개한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사람들은 나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무심히 오고갔다.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던져져야만 했던 익숙한 부품 같았다. 


처음부터 선택을 원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류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만난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한다는 것을.


수많은 층수는 마치 진열장에 먹음직스럽게 전시된 조각 케이크 같았다. 똑같은 규격 속의 숫자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는 나를 충분히 흥분시켰다. 지하부터 꼭대기까지의 층수를 눈으로 훑던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의 층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조금은 즐겨보기로 했다. 우선 다시는 결코 누르지 않을 지하세계부터 상상해 본다. 그곳은 생각보다 밝을지도 모른다. 형광등의 빛이 조금은 부담스럽겠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그러다 보면 그곳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끔 햇빛은 그립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지하세계와 닮았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나는 그를 비출 형광등 불빛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나조차 추스르지도 못하면서 나와 닮은 그를 구원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밝아지고자 했던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흔들리는 형광등 불빛이, 그러니까 고작 저 형광등 불빛 따위의 역할을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떠난 뒤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지하세계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떠나고 내가 겨우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너무 눈부셔 견딜 수 없던 햇빛.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말려야 했다. 바삭바삭하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그걸 원하기는 하는 걸까. 이전의 나는 벗어버린 껍데기처럼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지하세계에 머문다.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그것을 원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나는 수많은 층수를 눈으로 훑는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주어졌다는 듯이 내 선택을 기다린다는 듯이. 어쩌면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닐 텐데. 그저 주어진 세계에 던져지는 몸뚱이만이 내가 가진 전부일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은 한 번쯤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한다. 생각만으로도 숨 막히는 공기. 내가 있던 곳보다 몇 배는 더 따가운 햇빛. 이곳으로 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만 했다는 희열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전의 나는 그저 과정일 뿐이었다는 듯이. 이제야 내 안의 무언가가 완성된 것이다.


그 뜨거운 공기를 한숨에 몰아 내쉬고 나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 손가락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잠시라도 선택을 미룬다. 어쩌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나는 낯선 세계로 던져질 것이다. 내부의 엘리베이터는 너무나 순식간에 깨어져 버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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