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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Dec 31. 2021

[단편] 초록

초록에 관한 단상

온통 흰 눈밭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가 어딘지 내가 어디까지 걸어온 것인지 바로 조금 전의 발자국까지도 찾을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집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뒤를 돌며 나는 방향을 잃었다.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 뒤섞여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보다 걷는 것이 더 중요했다.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무언가는 하고 있고 나는 쓸모없지 않다는 것. 쓸모없지 않다는 것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 쓸모없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무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 나는 원래 초록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초록이 무엇인지 몰랐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초록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초록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초록에 대해 생각했다. 초록은 무엇일까. 원래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내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온통 흰 눈밭이었기 때문에 오직 살갗에 닿는 차가움만이 눈이 내린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눈은 포근하지만 동시에 차갑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눈덩이들을 두 발로 밟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초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 눈덩이들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어떤 침투와 시간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린다.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는 이들이 자꾸만 나에게 너는 원래 초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초록이든 흰 눈밭이든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오직 걸어가고 있다는 것. 여전히 나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이곳에서 나는 걷고 있었고, 지쳤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걷고 걸을수록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냥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때 눈보라가 쳤다.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오랜 길을 걸어왔지만 이런 눈보라는 처음이었다. 눈보라가 내 몸을 휘감고 그 무엇도 볼 수 없게 만들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이곳에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쓸모 있는 존재였다. 

그것이 내 몸을 앞 뒤 옆으로 휩쓸리게 할 때 나는 그 자리에 남기 위해 맞은편으로 힘을 써야만 했다. 무언가에 맞섬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됨으로 인해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문득 궁금했다. 그녀도 내가 초록임을 알고 있을까. 아니 내가 초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까. 그녀는 나를 본 적은 있는 걸까. 볼 수 있었나. 아니 그녀가 있기는 했던 걸까. 정답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 초록은 바로 그녀였으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던 것 같지만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찰나의 순간만큼 걸어온 것 같았다. 눈밭에서 내가 아주 작은 점이 되고자 했을 때 더욱 그랬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점이기도 했다. 점과 점. 단지 그것에 불과했지만 점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은 모든 것을 걸만큼 치열했고 단단했다. 

하지만 초록은 점과는 달랐다. 그것은 움직일 수 있었고 변화할 수 있었다. 안으로 응집되는 것이 아닌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면을 사람들은 모른 채로 너는 원래 초록이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초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그들에게 초록이었던 것이고 지금은 왜 초록이 아니게 된 것일까. 어쩌면 내가 계속 걸었기 때문이다. 계속 걸음으로 인해 초록에서 작은 점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눈보라가 그쳤고 나는 이제 다시 걸을 수 있었다. 걸어야만 했고 걸을수록 더 고독해졌다. 그녀를 위해 걸어야 했지만 걸음으로 인해서 그녀와 계속 멀어졌다. 하지만 멈춘다면 영영 그녀를 보지 못하리라. 

한편에서 나는 그저 그 자리에 멈춘 채 그녀를 위한 초록이고 싶었다. 초록은 치열하지만 파괴하지 않는다. 밖으로 뻗어나가지만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둔다. 초록은 단지 초록이고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일순간, 모든 눈이 녹아내리는 때에 초록은 늘 그랬듯 그곳에서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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