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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Dec 31. 2021

[단편] 반대편의 사람

여기 혹은 저기

저기, 반대편에 사람이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빨간불은 좀처럼 초록불로 바뀔 줄을 모른다. 발을 동동 구르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신호가 바뀔 거라는 것을 안다. 초록불은 너무나도 친절하고 철저하고 정직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의 사람은 좀처럼 이쪽으로 건너올 줄을 모른다. 

반대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 서 있었고, 또 내 발 밑만 볼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디디고 있는 땅 그곳이 나에겐 전부였고 반대편에 사람쯤은 나에게 대수롭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 화가 나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들을 바라봤다.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나는 끊임없이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신호는 수시로 바뀌었다. 빨간불로 또 초록불로. 그 중간은 없었다. 나와 그들은 그저 양끝에서 불빛 한 점에 의지하는 존재들이었고 그 사이를 수많은 차들이 바쁘게 오고갔다. 우리는 하얀색 줄 위를 주어진 시간 안에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했다. 늘 그랬다. 

반대편의 사람은 결코 쉽게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지만 대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행복을 불쾌해했고 어쩌면 내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그들이 불안했고 어서 대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이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들의 사랑까지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의 안전을 보장 받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반대편에서 따가운 시선을 감춘 채 침묵할 뿐이었다. 

때로는 헷갈리는 순간도 있었다. 그들이 거기 서 있긴 한 걸까? 내가 그들의 생각을 혹은 그 존재 자체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그저 흘러가는 바람일지도 몰랐다. 가만히 두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하지만 내가 그들을 인식한 순간 그들은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러니까 어찌할 줄 모른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다음 초록불에는 반대편으로 건너가볼까 고민을 시작한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았을 무렵. 신호가 떨어졌고 반대편의 사람이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주춤 거리며 그저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부터 도망칠 곳은 없었다. 선택은 오로지 하나였다. 반대편의 사람쪽으로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이 자리에서 우두커니 그들을 기다릴 것인가. 선택은 나에게 맡겨졌지만 사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반대편의 사람은 분명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무도 두려운 시간이었지만 차라리 빨리 모든 것이 끝났으면 했다. 무엇이든 결론을 짓는 것이 양끝에 서 있던 시간보다는 나아보였다. 어쩌면 이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나에게 무언가 화가 나 있는, 내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어하는 그들을 향한 알 수 없는 연민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나를 증오하는 그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 듯했다. 나 또한 나를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을 때로는 친구처럼 여겼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로부터 그리고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그들이 나를 향해 도달하기 전에 지금 서있는 땅이 저 아래로 순식간에 꺼져 어딘가로 사라져버릴까 고민도 했다. 바람이 불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이 바람이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반대편의 사람은 순식간의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동시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반대편의 사람이 되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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